엄마들의 글쓰기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10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아이 학교 어머니 독서회의 회장을 맡았다. 입시에 초집중해야 하는 3학년 엄마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2학년 엄마가 회장을 맡는 게 회칙이었다. 얼떨결에 회장을 떠안게 됐다는 건 다른 사람 얘기고, 나는 회장이 되고자 강력하게 물밑작업을 했다. 아이 1학년 때는 총무를 했고, 회원들에게 ‘내년에 내가 회장 할게요’라는 의지의 눈빛을 발사했으며 2학년이 되어서 회장 선거일에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자기 추천을 했다. 내 기세에 눌렸는지 (사실, 보통은 딱히 하고 싶어 하는 회원도 없다. 모두 옳거니 하며 ‘네가 하세요’ 했을 수도) 단독 후보인 내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독서회 회장은 권위도 이득도 없는 자리다.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며 ‘시작하겠습니다’와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다. 오히려 총무가 할 일이 더 많다. 매번 회비를 걷고 간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독서회 회장이 탐났다. 벼슬을 좋아하거나 앞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아들 입시에 도움’이 되는 일도 없다. 그냥 독서회가 좋았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매개체의 특성상 정말로 독서를 좋아하는 엄마들의 모임이었다. 오히려 자식 입시의 스트레스를 독서로 달래고 싶어 했다. 입시경쟁이라는 지옥을 뒤로하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우아한 독서의 세계로 탈출하고픈 엄마들이었다.
의논하고 읽을 책을 정한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읽은 책을 발제한다. 발표한 후 자유스럽게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눈다. 모든 독서의 귀결이 자식 이야기라는 점이 특이 사항이긴 하지만.
선정 도서는 다양했다. 에세이는 기본이고 시, 역사, 문화, 과학, 철학, 다양한 장르의 소설 등 엄마들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르고 즐겁게 읽었다. 본인 전공 분야의 책이 선정된 달은 그 엄마에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배울 수 있어 그 역시 값진 시간이었다. 나는 이 모임에서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처음 읽고 일본 작가의 선입견에서 벗어났다. 그 후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을 거의 모으다시피 사서 읽었다. 다작의 달인인지라 쏟아지는 그의 소설을 전부 읽어 젖힐 수가 없어 어느 순간 시들해졌지만. 하여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범죄와 수수께끼와 반전의 추리소설이 아닌 인류애와 아름다움과 감동의 추리소설의 매력에 눈뜨게 됐다고나 할까. 내가 닮고 싶은 문체의 소유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은 일도 거대 수확이었다.
그달의 발제를 맡은 엄마는 A4용지에 조사한 자료와 감상을 써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준다. 제일 윗줄에 책 제목이 있다. 그리고 다음 줄에는 낯선 이름의 활자가 보인다. 누…구? 아! ㅇㅇ엄마~ 우리는 ㅇㅇ엄마의 본명을 부르며 새삼 까르르 웃는다. 엄마가 엄마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때는 사고와 행동이 자유로웠으며 내 이름 외에 특별히 두고 품어야 할 이름도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가고 싶은 곳을 갔을 테며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을 테지. 엄마의 이름으로 사는 순간부터 그 이름은 잠시 뒷전으로 밀어둔다. 하고 싶은 말과 못다 이룬 꿈도 잠시 옆으로 밀쳐둔다. 아이가 크면, 아이들이 잘되면, 그때 다시…….
엄마들의 글이 쓰인 A4용지 묶음이 내 책상 위에 쌓이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회장이 하는 일도 없이 회장이냐? 뭔가 발자취를 남기자!라는 개인적 성취의 지질한 욕망도 있었으나 사실 나는 엄마들의 글이 너무 아까웠다. 그녀들은 자신이 쓴 글을 부끄러워했다. 내가 무슨 글을, 이라고 생각하는 소심한 자아들은 발표 직후 자신의 글을 그냥 폐기처분, 쓰레기통으로 직진 골인시켰다. 그 글들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글 제목 옆에 엄마들의 예쁜 본명을 꼭 써주고 싶었다. 엄마이기 전에 불렸던 효리, 제시, 화사 (연예인 이름으로 대신합니다) 같은 예쁜 이름을. 글을 모아 정리하고 제본해서 회장을 인계하는 시점, 아이가 고3이 되는 연초에 우리끼리 기념으로 나눠 가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비매품 문집. 그때만 해도 행동력 갑이었기에 당장 몸을 움직였다. 선배 엄마들의 글까지 수소문해서 원본 파일을 받았다. 토대이자 뼈대로 이 모음을 든든하게 이어준 선배 엄마들을 소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드 파일이나 한글파일로 글들을 정리하고 그냥 인쇄소에 제본을 맡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하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겼다. 여기저기 정보의 바다에서 헤매던 중 인디자인을 알게 됐고 독립출판도 알게 됐고 소량 인쇄 가능한 인디고 인쇄(디지털 인쇄)도 알게 됐다. 에라 이럴 바에 제대로 해보자. 해서, 나는 인디자인을 배웠다.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인디자인을 ‘지금은 모르고 그때는 안다.’ 내 뇌의 구조가 그렇다) 디자인 문외한이라 표지가 걱정이었다. 그때 캘리그래피가 떠올랐다. 독서회 특강으로 한 번 배웠던 캘리그래피 선생님을 급히 섭외하였다. 개인 교습을 받으며 책 표지에 들어갈 제목을 간신히 내 손으로 쓸 수 있었다. 책 제목은 ‘엄마들의 책수다’. 책수다? 캘리그래피 선생님의 아이디어였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출판사 대표의 욕망은 없지만, 로망은 있는지라 선생님의 동의를 얻어 냉큼 출판사 등록을 해버렸다. (5년째 책 한 권도 출간 안 하고, 할 생각도 없고, 등록비만 열심히 내고 있다는 게 약점!) 그때는 행동력뿐만이 아니라 추진력도 갑이었나 보다.
회비 예산 초과와 초기 비용 문제, 여러 가지 다른 일로 독립출판은 포기하고 인디고 인쇄로 비매품 소량 출판을 했다. 배부하던 날 나는 너무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지고 목소리까지 쩌렁쩌렁해졌다. 회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 주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글을 살폈다. 엄마의 이름에 가려진 그들의 농밀한 언어의 세계가 내 안에 감응이라는 말로 다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엄마들의 글쓰기였다.
나는 지금 동네 서점 <책방 ㅇㅇ>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의 회원이다. 일주일마다 글을 써서 카페에 올린다. 서로 격려와 공감과 위로를 댓글로 나눈다. 온라인 모임이라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은 없지만,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정이 들었다. 그들의 글. 엄마들의 글. 글을 읽고 있으면 엄마들의 얼굴이 그려진다. 성격도 말투도 느껴진다. 때로는 상상한다. 울 땐 꺼이꺼이 울까 흑흑 울까? 웃을 땐 손뼉을 칠까, 친구의 어깨를 칠까? 엄마들의 글은 엄마의 글이 아니라 사람의 글이다. 솔직해지고 너그러워진다. 웃고 행복해한다. 엄마이기에 참았던 화와 슬픔을 글로 담아낸다. 언제가 엄마들을 만나서 한 명씩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비록 지금은 엄마들의 글쓰기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의 글쓰기가 될 테니까. 그러니 엄마들이여, 멈추지 마시길. 계속해서 글을 쓰시길. 엄마들의 글이어도 좋고 내 이름의 글이어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