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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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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9

글쓰기 모임은 비록 얼굴은 서로 마주하나 나의 본 정체를 가리고 익명처럼 지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본명, 직업, 나이 등 그동안 자의든 타의든 몸에 걸쳤던 역할을 함구할 수 있다. 무명 씨 방랑의 자유를 느낀다고나 할까.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밀한 관계의 숨 막히는 밀도를 빠져나와 광활한 우주로 떠다니는 미세한 입자 하나처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 역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체는 숨기지만 자아는 드러낸다. 역할과 관계에 부딪혀 말하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가족에게 생기는 양가감정이라든지, 사회를 향한 분노라든지, 심지어는 동성에게 느끼는 사랑조차도 비록 처음엔 머뭇거릴지라도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쏟아내고 만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서로에게 익명으로 남은 채 연결의 끈을 잘라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이렇듯 글쓰기 모임에서는 많은 이야기와 글이 오간다. 내가 사는 나라가 맞나 싶을 만큼 생소한 서사가 나를 놀라게 한다. 뉴스 머리기사로 그냥 스치듯 읽고 난 후, 내 일이 아니기에 작은 감응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무수한 사건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글 쓰는 삶의 동력이 되고 있었다. 무심하게 살아온 지난 일상이 부끄러웠다.   

  

2009년 초 나는 뭘 했지? 유학 준비로 바빴던 것 같다. 내 아이 하나 잘 가르쳐보겠다고 영어 그림책을 공부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다른 아이들까지 가르치게 됐고 운이 더 좋았는지 (더 나빴는지) 주위에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몰렸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어 그림책 전문가로서 영어 전공자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성공의 욕망이 (있지도 않던) 학업의 열망을 낳았다. 때마침 내 아이도 적당한 시기였고 해서 둘이 같이 떠나기로 했다. 그때, 용산 참사가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던 시기다. 신문을 구독했는데 잠깐 머리기사로 읽었다. 그리고는 관심 무. 내 일이 아니었기에 내 가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기에 잊어버렸다.   

  

10년이나 된 용산 참사는 진행형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누군가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여전히 분개하고 있었고 글쓰기 소재로 삼으며 잊지 말자고 우리에게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사회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다고 우리를 각성하게 했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 작은 일상만을 지키고 살아가고자 했던 이기적이고 좁은 내 사고가 부끄러웠다. 내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니고 내가 손해 본 것도 아니라는 안도감이 우선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살고 있었다.   

  

나는 ‘정상 가족’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 가족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가는 많은 이야기와 글. ‘정상’은 누구의 잣대로 판단하는가. 누구도 ‘정상’을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은유 작가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말을 인용하며 평범함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그 일에 대해 경험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나 역시 정상 가족을 생각해본 적도 고민해 본 적도 없기에 어쩌면 사회가 정의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평범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을 잊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는 사회가 어처구니없이 정해버린 정상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들은 의심하고 갈등하고 변론하면서 정상 가족의 벽을 허물려고 분투했다. 평범의 의식조차 불필요한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매일 생각하고 고민하고 겪어내야 하는 특별한 삶임을 나는 이제야 안다.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울 수도 있고 아빠 없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으며 아빠가 둘일 수도 있다. 지지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비건도 딩크족도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좀 더 세심하게 돌아보게 됐다. 어쩌면 그동안 나와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진 이들에게 좀 냉소적이었던 듯하다. 인간의 본능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이들을 패배주의라 생각한다든지 보편적인 삶을 비켜서 사는 이들에겐 겉멋 들린 사춘기 열병이라고 치부했을 수 있다. 내가 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듣고 보고 생각하면서 평범과 보편은 누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살던 대로 살다 보니 경험과 인식이 부족했다. 내 사고는 좀 더 유연해졌다. 나와 다른 누군가가 나와 다른 삶을 살며 나와 다른 사고를 한다. 타인의 소소한 일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의 힘겨운 행복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 글쓰기 모임에서 그들의 글을 듣지 않았으면 모두 그냥 지나쳤을 일들이다.     


말을 잘하려면 남의 말을 잘 들으라 한다. 곡을 잘 연주하려면 남의 연주를 잘 들으라 한다. 그러니 글을 잘 쓰려면 남의 글을 잘 들어야 하겠지. 다른 이의 글, 다른 이의 삶, 다른 이의 생각.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은 남의 글을 듣는 데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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