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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23. 2021

엄마와 화해하려고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8

단편소설을 써 보았다. 엄마 이야기를 썼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신춘문예 같은 거. 생각만 해도 언감생심일세) 아마, 엄마와 화해하고 싶었나 보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정서가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은 있을 엄마의 언어. 포근함, 다정함일 수도 있고 집밥이나 자장가일 수도 있겠지. 내 엄마를 대신하는 언어는 슬프고 아프다. 억울하고 화난다. 엄마는 아들을 너무 사랑했다. 엄마는 쉰 살도 안 돼 남편을 잃었다. 엄마가 아들에게 미래를 기대하고 의지하다 못해 주눅이 들 때까지, 아들이 아닌 나는 가슴속에 원망을 차곡차곡 쌓아야 했다. 찐득하게 들러붙어 닦아낼 수도 없이 켜켜이 쌓인 장롱 뒤 먼지처럼. 화해는 우습고 용서는 구차하다. 그렇게 살아진 인생이 한둘일까마는. 딸을 자신만만하고 발랄하게 키우는 세상에 일찍 눈을 뜬 엄마가 몇 있었다 해도, 그 시절 보통의 엄마들은 딸을 다 그렇게 키웠다고 넘겨버릴 수 있다. 아니면 그 시절 엄마들은 그보다 더한 시절의 엄마들 방식으로 길러졌다고 무마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잘 안 된다. 이해도 용납도 잘 안 된다. 엄마를 볼 때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과거와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회오리치듯 가슴을 한바탕 휘몬다.  

   

엄마는 얼마 전 엉덩관절이 부러지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하시다. 대신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나는, 엄마 집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문득 억울해진다. 엄마에게 드릴 반찬을 만들다가 순간 화가 치민다. 매달 잘 보내던 용돈을 부치다가도 갑자기 서러워진다. 그냥 이따위 효녀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다고, 돈이고 사랑이고 죄다 가져간 오빠 보고 ‘너나 하라’고 악을 쓰고 싶어 진다. 하지만 독거노인같이 사는 엄마 모습이 떠올라 그만 눈물이 난다. 엄마만 보고 오면 ‘철 안 든 나’와 ‘철들고 싶은 내’가 싸운다. 싸우는 데 며칠 치 힘을 다 써버 린다. 뭐 하자는 건지.     


엄마 얘기를 좀 더 해볼까. 엄마는 나를 미워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동생과 달리 고분고분하지 않고 때려도 말을 안 듣는 내가 얼마나 징글징글했을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 오빠 기를 다 잡아먹는 년, 못된 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았다. 가끔은, 사막에 던져놔도 굶어 죽지 않을 년이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는 말도 들었는데, 엄마는 알까? 엄마가 속았다는 걸. 나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다는 걸. 오빠만 잘해주는 엄마가 미워 죽겠으면서도 외할머니 집에 가서는 밤마다 엄마 보고 싶어 울었는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난 혼자여도 괜찮은지 안다. 내가 어디 가서도 할 말은 하고 자기 몫 뺏기지 않고 야무지게 싸울 줄도 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엄마는 몰랐다. 초등학교 때 나를 따돌리며 몰아세우던 그 아이들한테 이유가 뭐냐고 따지지도 못하고, 그저 친구 한 명이면 된다고 몰래 기도하면서 울었는데. 엄마는 내 일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잘못하면 그때 매를 들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친한지 뭐가 먹고 싶은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먹고살기 바빴다는 핑계는 진짜 핑계다. 오빠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옷도 가방도 신발도 다 있었고 내가 그렇게 바라던 생일잔치도 했으니까. 물론 엄마는 오빠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하거나 부드럽게 손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격이 원래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사랑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 걸. 가끔 엄마는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말한다. 언제 그랬냐고? 날마다, 매번.    

 

지독한 원망이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엄마를 생각하면 서운하다. 이럴 때 나를 돌아보면 참 유치하다. 이제 엄마한테 그만 화를 풀어도 될 때 아닌가. 아니, 아니다. 어쩌면 난 왜곡된 기억으로 혼자 힘들어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동생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보던 순간, 너무나 달라 당황했다. 잠깐 엄마한테 미안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순간의 일들과 그날의 감정은 뭘까. 내 온몸에 진저리 치도록 달라붙어 있는데, 어떻게 거짓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삶은 그냥 이렇게 살아졌다. 여기까지 살아왔다. 흥건히 젖어 움푹 팬 땅을 얇고 마른 종이로 살짝 덮어놓은 것이다. 언뜻 보면 아무 탈 없는 평지지만 살짝 밟기만 해도 푹 꺼지겠지. 누군가 밟기 전에 나는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글을 쓴다고 슬프고 아프고 비루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의 실타래 그대로를 알아가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삼 년 전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 내 얘기를 원 없이 썼다. 오빠 욕도 쓰고 엄마 흉도 봤다.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화해하고 싶지도 않다고 글로 바락바락 댔다. 어설프게 익어버린 어린 날의 감정들을 인제 와서 어쩌자는 건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감정을 헤집고 솎아서 차례차례 토했다. 괜찮다고 위로받았고 잘했다고 응원받았다. 말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수다로 끝났을 유치한 감정의 조각들이 글로서 나름의 근거를 얻었다. 글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설이든 시든 일기든 에세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으로 털어내고 정리했다. 어느 날 문득 감정의 실타래가 조금 느슨해진 걸 느꼈다.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걷는 엄마를 보는 건 힘들다. 사실 ‘힘들다’만으로는 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안쓰러움과 미움이 동시에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자주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받고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그래서 쓰고 싶었나 보다. 마음을 쓸어내리고 위로받았던 지난 글쓰기를 생각하면서 꼬인 실을 조금 더 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글이 달랐다. 그때는 쏟았다면 이번에는 주워 담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여기를 사는 나와 엄마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결말로, 소설이 끝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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