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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16. 2021

무엇이든 사게 된다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7

문구류 중독자다. 책상 위, 서랍, 각종 빈 약상자, 과일 담는 플라스틱 용기, 음식 배달용 플라스틱 용기에도 (긴 플라스틱 통을 세 칸으로 나누어 놓은 반찬 용기는 작은 문구류를 종류별로 정리하기 딱 좋다) 문구류가 그득그득 넘쳐난다. 책꽂이에는 갖은 노트 종류가 빼곡하다. 필사용 공책을 모았다가, 메모용 수첩도 모으고, 독서기록장도 사재꼈다. 앞쪽 두어 장 쓰고 만다는 게 함정. 필통은 말도 못 한다. 종이 필통과 가죽 필통을 넘나들면서 플라스틱 필통은 기본이고 철제필통까지 다종다양하다. 심지어는 인기 있는 아동용 브랜드의 필통도 (조카를 사주겠다는 핑계로) 색깔별로 용도별로 사서 쟁여놓았다.  

   

물론 ‘문구 사랑꾼’은 수도 없이 많기에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문구류 폐인이 됐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내 방에 쌓여만 가는 문구류를 보면서 남편은 물론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편집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저렇게 결심을 하고 마음을 먹어도 형형색색의 문구류를 보면 그동안 없던 쓸모가 생겼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그 문구를 아주 소중하게 손에 들고 귀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내 벼르던 그림책 심리를 공부하게 됐다. 그때 내 안에서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 놀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늘 잊지 않고 있던 추억 하나. 초등학교 몇 학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학년이었던 듯하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문방구에 가고 있었다. 예전에 엄마는 오빠 사랑이 지독했다. 위로 두 살 터울 오빠는 왕자였다. 항상 그러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얻으며 나와 내 여동생은 꿈도 못 꾸는 호사(?)를 누리고 살았다. 그 당시 오빠의 필통은 자석 필통이었다. 파란색 비닐 뚜껑이었고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방송 중이던 로봇이 그려져 있었다. 좀 산다는 집 아이들만 가질 수 있었던 자석 필통. ‘좀 살지도’ 않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오빠만 ‘좀 사는’ 집의 호사를 누린 것이다. 문제는 엄마 말 잘 듣고 포기 잘하는 착하고도 가엾은 여동생과는 달리, 나는 오빠의 일이라면 무조건 ‘나도!’를 외친 데다가 고집도 세서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엄마도 끊임없이 ‘나도’를 외치는 나에게 쉽게 ‘그래 너도’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또 하나의 문제였다. 나도 당연히 자석 필통을 가지고 싶었다. 눈이 왕방울만 하고 머리는 이라이자 (만화 주인공 ‘캔디’의 영원한 적수)처럼 파마한 공주를 그려놓은 자석 필통을 가지고 싶었다. 분홍색 자석 필통. 신나는 마음으로 문방구에 도착한 나는 엄마의 선택을 믿을 수 없었다. 플라스틱 필통을 고른 엄마. 거기다가 하늘색! (슬프게도 문방구에 분홍색은 없었나 봐요) 그때부터 우리는 실랑이를 시작했다. 나는 징징거리고 조르고 떼를 썼지만, 엄마는 단호한 표정으로 필통 값을 치르고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질질 끌려가면서 울었다. 이거 싫다고! 자석 필통 사달라고! 엄마는 나를 혼내다가 달래듯이 플라스틱 필통을 내 손에 쥐여 주며 다음엔 자석 필통을 사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나는 이 나이까지 ‘웃기고도 슬픈’ 추억으로 남게 된 충격적인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두구두구두구......    


60초 후에 계속됩니다!

 

순간적으로 그 플라스틱 필통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린 것이다. 필통은 다행히 박살이 나지는 않았지만, 뚜껑 한 귀퉁이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첫째는 ‘아, 혼나겠구나’였고, 둘째는 ‘아, 필통이 깨졌으니 또 사야 하는데, 이번엔 자석 필통을 사주시겠지’였다. 하지만 삶은 역시 쉬운 게 아니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었다. 엄마는 나를 노려보며 잠시 숨을 고르더니, 필통과 깨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집으로 갔다. 어, 자석 필통이 아니고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따라간 나는 내 인생이 참으로 구리고 지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는 테이프로, 그것도 검은색 테이프로 깨진 조각을 붙인 후 쓰라고 내게 건넸다. 나는 울었다. 필통을 받을 때도 울고 가방에 넣을 때도 울었다. 울면서 결심했다. 엄마 같은 엄마는 절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내 안의 어린 놀자는 자석 필통이 너무 갖고 싶었다. 필통뿐만이 아니었다. 부잣집 친구가 서랍에 가득 채워 넣었던 꽃 편지지도 공책도 샤프펜슬도 나는 너무나 갖고 싶었던 거였다. 어른 놀자는 어린 놀자를 달래려고 그렇게도 문구류를 샀나 보다. 그림책 심리를 배우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이런 감정적 정리를 좀 하고 나니 문구류 광적 수집을 서서히 끊을 수 있었다. 살 만큼 샀으니 이제 됐다는 마음도 들었고 대대적으로 집 정리를 할 때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냥 쌓아둘 수도 없는 나름 심오한 내적 갈등으로 지친 탓도 있었다.  

  

언제나 문제는 책이다. 김중혁 작가의『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어버린 것이다. 김중혁 작가의 창작 친구들을 소개받았다. 화이트보드나 아이패드는 나하고 맞지 않은 친구이기에 별로 관심이 안 갔다. 에스프레소 잔은 눈길도 안 주었다. 나는 달곰하고 손쉽게 타 먹는 커피믹스 애호가이니까. 기계와 친하지 않아서 블루투스 헤드폰이나 스피커는 써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듯했다. 독서대나 스탠드, 텀블러 같은 건 있으니까 쉽게 넘어갔다. 그런데 작가가 펜 친구를 소개하면서부터 서서히 내 동공이 확장되더니 ‘팔로미노 블랙윙’ 연필을 소개하는 순간 나는 움찔했다. 어머나, 이런. 내가 이 연필을 왜 몰랐던 거야? 거기다가 존 스타인벡이 사랑했던 연필이라니. 또 거기다가 펄이란다, 펄, 피이에이알엘. 연필이 진주처럼 반짝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자 나는 바로 핸드폰을 켰다. 검색창에 브랜드 이름을 쳤고 제일 먼저 뜬 온라인 상점에서 일단 소박하게 펄 세 자루 매트 세 자루를 샀다. 또 문구류를 사느냐는 자책을 잠깐 했지만, 문구류 중에서 연필은 많이 안 샀다는 자기 합리화를 해내고 말았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연필로 글을 쓴다면 좀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연필이 부드럽게 굴러가듯 글도 부드럽게 굴러가게 될지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그 뒤 나는 인터넷 연필 수집 카페를 들락거리게 됐고 연필만 파는 가게도 알게 됐다. 세상에는 연필 수집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책을 책꽂이에 꽂듯이 연필을 통에 담아 쌓아 놓는 수집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연필의 형태와 색과 필기감을 넘어 연필 담는 통의 미학까지 고려하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연필 수집 카페에 출석하고 틈마다 인터넷 검색창에 연필 종류를 치던 나는 어느새 블랙 윙 602, 840, 3, 155, 42 등 시리즈를 모으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BLACKWING×TWA HOTEL, BLACKWING•ERAS,

BLACKWING×Philadelphia Museum of Art, BLACKWING×THIRD MAN RECORDS, BLACKWING•NATURAL 등 한정판인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샀다. 여기서 끝이면 재미없지. 팔로미노 블랙윙 말고도 스테들러와 톰보우, 파버카스텔, 까렌다쉬의 연필도 사고 이름도 읽기 힘든 포르투갈 연필까지 샀다. 심지어는 마음에 드는 연필을 찾으려고 이베이나 아마존까지 들락거렸다. 단종된 연필이나 한정판은 원가의 열 배가 넘기도 했다. 다른 수집가들에 비해 나의 절실함과 연필의 필요함이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인지, 터무니없이 비싼 연필은 사지 않았다. 외벌이로 애쓰며 주말에만 집에 오는 남편을 생각하고 가정 경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평소 내가 행하는 각종 집착에 비교하면 연필집착은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는데, 그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연필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왠지 글을 잘 쓸 것만 같아서 연필을 사기 시작했는데, 사다 보니 서랍만 꽉 찼고 정작 글은 노트북으로 쓰는 거다. 연필은 책 읽으면서 줄을 긋거나 급하게 전화번호나 주소, 계좌번호 적을 때만 사용하더라. 사 놓은 연필을 보니 죽을 때까지도 다 못 쓰는 건 분명하다. 또 선호하는 연필이 생겨서 줄 긋는 것마저도 쓰는 연필만 쓰게 되니 안 쓰는 나머지는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비발’ 이라는 게 있다. 그럴듯한 장비를 갖추고 일을 시작하면 더 잘할 듯싶다. 난 뭔가를 시작하면 필요한 장비를 무엇이든 샀다. 펠트 공예를 할 때도 그랬고, 십자수를 놓을 때도 그랬고, 최근 코바늘 뜨개질을 배울 때도 그랬다 (쓰고 보니 전부 앉아서 하는 일이네.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나). 집착하던 취미를 그만두면 그동안 사 놓은 장비를 처치할 수가 없었다. 먼지가 쌓여 진득거리는 덩어리가 될 때까지 보관하다가 버리거나 닦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쓸 때 이것저것 옆에 놓을 수 있는 넓은 상판의 책상을 샀고 오랜 시간 앉아있어도 편안하다는 의자를 샀다 (바닥에 앉아서 소파 탁자에서 쓰거나 좌식 책상을 들고 침대에서 쓴다). 튼튼한 원목 독서대는 물론이고 (주로 침대에 반쯤 누워서 책을 읽는다) 꺼내 쓰기 편하도록 연필꽂이도 샀고 (연필 안 쓴다고요) 어휘력 향상을 위해 두께가 어마한 ‘세계만물 그림 사전’도 샀다 (무거워서 잘 안 펴는 게 약점 그리고 인터넷으로 찾으면 다 나온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작 글을 쓸 때는 달랑 노트북 하나면 된다는 사실. 굳이 필요하다면 건강한 신체? 몸과 노트북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 이렇게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거다. 그런데도 나는 외적 필요가 아니라 내적 결핍에서 자꾸 뭔가를 사게 되는 것이다. 무당 굿하듯 뭔가를 사서 옆에 놓아두면 글의 실마리가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공부하기 전에 방부터 치우는 심리랄까.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지나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장비준비로 마음을 달래는 거다. 글쓰기 친구들을 소개하면서 무엇이든 쓰게 된다고 말하는 김중혁 작가와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무엇이든 사게 되는 나의 차이,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그러니 글을 잘 쓰려면 사지 말고 쓰자. 지금 바로 쓰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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