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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10. 2021

일단 쓰는 거로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6

비가 온다, 라고 첫 문장을 쓰니 재미없다. 낡아빠졌다. 그래도 어쩌랴, 비가 온다. 작은 좌식 책상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는다. 내리는 빗소리에 오토바이 소리도 함께 흐르고 어디선가 자동차 문 닫는 소리도 바람을 탄다. 누군가는 지금 여기의 하루를 살고 있겠지만, 나는 어디 먼 곳의 시간에 나를 묻는다. 새도 한몫한다. 지저귀는 소리에 집중하자니 여기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게 틀림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변덕스럽다. 시간과 마음을 써가며 자기비하에 절어 지겹게 하루를 탕진하고 나면 결국 ‘그래도’라는 뒤끝 작렬한 단어를 내뱉게 된다. 그래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인생의 해답은 찾을 수 없고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점에 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점의 냄새. 먼지와 잉크와 종이의 냄새가 하나로 섞이고 그 서점만이 갖고 있다는 독특한 향기까지 더해 후각을 자극했다. 서점의 기억은 코끝으로 온다. 천장만큼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정답은 없어도 여러 가지 선택지는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곤 했다. 책으로 만든 우주에서 유영하며 책 냄새에 취하고 활자에 넋을 잃었다. 책더미를 그냥 보기만 해도 좋았다. 우울하거나 불안하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책을 들춰보았고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을 땐 선배 엄마들의 육아서를 읽었다. 무식이 부끄러워 철학책과 인문학책을 찾았고 성공에 목말라 자기계발 서적을 쌓아놓고 읽기도 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이 없는 게 신기로울 뿐이다만!) 삶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우연적이라 읽은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서점에 가고 기어코 책을 들여다본다.     


글을 쓰고 싶어진 후에도 그랬다. 글쓰기 책을 읽었다. 마음먹고 달려드니 쓰기 관련한 책은 해변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사르륵 빠져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그 모래알을 양손 가득 한 움큼씩 잡아보기로 했다.     


누군가 단문으로 쓰라고 하면 단문만이 꼭 좋은 글은 아니라고 다른 이가 말했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도 했지만 나는 ‘쉬운 글’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쓰는 글이 쉬운 글인지 수준 낮은 글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야 한다는 지침은 적용하기에 까다로웠지만, 무척이나 도움이 됐다. 추상적으로 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쓰라는 글을 읽고 내 글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글을 좋아하는 나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쓴 책도 있었고 마지막 문장에 힘을 주라는 책도 있었다. 독자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어야 하기에 긍정적 결말을 쓰도록 유도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예쁜 결말을 꼭 지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퇴고가 중요하다는 건 모든 글쓰기 책의 공통점이었다. 저자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말고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을 쓰라는 부분에서는 공감하면서도 참 힘들었다. ‘내가 독자라면’에서 ‘내가 독자여도’까지 오래된 괘종시계 추처럼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필사하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기도 했다. 나는 필사를 하기도, 하지 않기도 했다. 메모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길래 메모용 노트를 사 모으기도 했다 (메모는 주로 핸드폰 메모장에 한다는 점이 약점).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고 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감정의 울림을, 뼛속에서 시작하는 내면의 본질을 쓰라는 말로 이해했다. 그만큼 처절하고 절절하고 미친 듯이 쓰라는 말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스티븐 킹은 연장을 골고루 갖춘 목수의 연장통처럼 어휘나 문법 등 기본 실력을 탄탄히 하여 화석을 발굴하듯 글을 쓰라고 한다. 글쓰기의 목적이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서 행복해지는 거라는 그의 말처럼 나는 내가 여기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 글을 쓴다. 행복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에는 순전한 이기심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외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그 이유가 나에게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듯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치유하고 본능을 알아가고 삶을 이어간다. 쓸모를 다해 무존재 하는 나이로 늙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기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시간을 채운다. 다른 이보다 나를 위해 쓴다. 그러니 글을 잘 쓰려면 관계의 가면을 벗고 진짜 내 얼굴을 마주 봐야 할 터이다.    

 

해변의 모래알이 수없이 많아도 모양이 다 비슷하듯 글쓰기 책은 많지만 의외로 결론은 하나였다. 모두 하나의 정언명령을 따른다. 끊임없이 써라. 멈추지 말고 써라. 글을 쓰는 행위는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는 일과 같을 것이다. 분명 나는 걸었고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지만 높아졌는지 그 자리인지 모른다. 두 바퀴 세바퀴 돌아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내가 모르는 사이 어느새 지상에서 좀 더 멀어져 있다. 글쓰기가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 고깔 모양의 꼭짓점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면, 바닥에서 높아졌다는 사실을 쉽게 체감할 수 없겠지만 어느새 땅이 저 멀리 아래로 보일 날이 있을 터이다. 아니면 글쓰기란 아이들의 외국어 습득 계단과도 같을지 모른다. 바닥에서 조금도 오르지 못하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평지를 계속 걷다가 보면 어느새 아주 높은 계단을 하나를 밟고 우뚝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계단에서 또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첫 번째 계단보다 더 높은 두 번째 계단 위에 서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찾아 끝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어느새 하늘과 맞닿은 계단 꼭대기에 서 있을 터이다. 내가 쓰는 글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겠지.   

 

스스로 모멸감과 비하에 파김치가 되도록 절이고 나서는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그래도’를 되뇌고 보니, 나는 ‘이러쿵저러쿵해서 요렇게 조렇게 해가지고 여차여차하다 보니 이리저리 글을 잘 쓰게 되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이러쿵저러쿵도 하고 요렇게 조렇게도 해보면서 여차여차까지 하고 이리저리해도 잘 안 되지만, 그래도 글을 잘 쓰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라고 쓰려는 걸 기억하게 됐다. 그러니까 ‘잘 쓰는 이야기’를 하려고 게 아니라 ‘잘 쓰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워워, 잘 쓰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일단 쓰는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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