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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10. 2021

천재의 엉덩이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5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였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기를 보아하니 학사 일정도 다 끝나고 졸업 전 시간 보내기용 아니었을까? 개봉관이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찾아보니 명보극장) 3학년 전교생이 반별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둑한 극장에 들어가던 추억은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인생 영화를 보게 된다.


아마데우스. 제목을 봐서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일 것 같지만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이다. 영화 내내 장맛비 퍼붓는 듯한 모차르트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모차르트 명곡들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귓가에 울려댔다. 두 시간을 훌쩍 넘는 긴 상영시간은 학교 점심시간만큼 빠르게 지났다.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는 경건하게 신을 섬기며 성실하게 삶을 살아간다. 음악적으로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어 인기도 많고 왕에게 인정도 받는다. 늘 신을 찬양하며 신의 이름으로 음악을 하길 기도한다. 그러던 중에 모차르트라는 새로운 신예가 나타난다.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모차르트의 환영식에서 살리에리가 환영 음악을 작곡해 연주한다. 모차르트는 듣자마자 바로 곡을 모조리 외우는 데다가 자기 입맛대로 몇 부분을 고쳐 즉흥 연주를 한다. 살리에리는 모멸감을 느낀다. 살리에리가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모차르트의 음탕함, 경박함, 방탕함에도 타고난 천재성으로 자신보다 더 나은 음악을 작곡하는 점이다. 살리에리는 신은 공평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평생을 겸허하게 신을 믿으며 살아온 살리에리로서는 모차르트의 오만무례함이 치 떨리도록 싫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한다. 평범한 사람 중에서는 자신이 챔피언이라고 말하는 살리에리. 보통의 삶을 애써 살아내는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살리에리는 음악으로 신을 찬미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찬미하고픈 욕망을 주었으되 천재적인 재능을 주지 않은 신에게 원망의 말을 한다. 바로 그 유명한 대사.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그때 나는 얻어맞았다. 그 대사가 내 머리와 가슴을 내리친 것이다. 살짝도 아니고 평생을 안고 갈 만큼 충격을 주었다. 그 말을 하는 살리에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절망과 원망이 가득했던 눈. 내가 꼭 살리에리처럼 그렇게 마음이 쓰렸다. (영화를 본 관객들 대부분이 그 대사에 꽂히고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살리에리에 몰입한다는 사실은 늦게 서나 알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지)    


나는 천재를 좋아했다. 천재의 삶을 동경했다. 이상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랭보가 그랬듯이 나 역시 짧고 굵은 삶을 살고 싶었다. (뭐, 물론 요즘은 가늘어도 길게 살고 싶다) 남들보다 뛰어나길 바랐다. 뛰어나되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앞서기를 바랐다. 땀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으며 그런 나는 왠지 좀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뛰어나 보이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천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나 자신이 불쌍하면서도 미웠다. 그러니 살리에리의 명대사가 내 마음에 별처럼 콕 박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춘기 병을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     


그런 내가 살리에리의 대사를 마음에서 훌훌 털어버릴 뻔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 시절 한 반 정원이 60명에서 70명 사이였다. 그 아이들 틈에서 내 성적은 중간쯤이었다. 그때 내 짝꿍은 공부 잘하고 착한 반장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북놀자가 공부 좀 해서 성적이 올랐으면 좋겠어.” 왜 그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호기롭게 “몇 등이면 되겠니?” (원빈의 ‘얼마면 되겠니?’ 도 아니고) 라고 물어보았다. 반장은 10등 안에만 들면 좋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 나는 공부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적어도 그 친구 앞에서는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집에서는 몰래 좀 했겠지? 그래도 약속인데. 시험 성적이 발표되던 날은 그 친구보다 내가 더 놀랐다. 반에서 6등을 한 것이다. 진짜, 정말, 진심으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재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는 억측을 했고 나 역시 ‘천재인가?’라는 공상을 했다. 반에서 6등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아주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그동안 내 행적을 봤을 때 단번에 그 성적으로 올랐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긴 했다. 그 사건은 살리에리의 대사를 빌리자면 욕망의 나라에서 재능의 나라로 다리를 놓아준 격이다. 그 후로 나는 더 천재 놀이에 열중했던 것 같다. 이상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랭보가 그랬듯이 나도 천재의 삶을 살다가 역사에 한 획을 긋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을 줄 알았다. 물론 살리에리도 평범한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평범한 살리에리로 살기보다는 천재라는 이름을 얻은 채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모차르트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나 드라마가 아니다. (그때도 연출 놀자 극본 놀자 주인공 놀자의 드라마를 좋아했나보다) 내 일상의 행태를 보면 천재적인 삶은 고사하고 <영구와 땡칠이>의 ‘영구’적인 삶이라는. 내 성적은 그 뒤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중간에서도 더 아래를 향해 고꾸라진다. 공부를 안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뭐, 그렇게 금방 탄로가 났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난 모차르트가 아니고 살리에리였다. 아,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그냥저냥 인생을 이리 살다 보니 이제는 모든 일에 남들보다 몇 배를 노력해도 간신히 중간쯤 가는 일이 허다하다. 천재는 개뿔, 하는 일이 어리보기라고 욕이나 안 먹고 살면 다행이지 싶다. 천재를 갈망하는 일은 오래전에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천재가 되고 싶은 일이 딱 하나 있다. 당연히 글쓰기. 늦게 시작한 만큼 천재가 되고 싶었다. 열심히 애를 쓰고 노력해서 내 글을 세상에 알리기에는 내 시간이 얼마 없어 조급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쓱쓱 써 내려가면서도 남들보다 찬란한 어휘를 사용하고 화려한 문장을 쓰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그 사람의 공책에 쓰였으면 했다. 이런 한탄으로 한숨을 내쉬다 보면 매번 듣는 이야기가 있다. ‘글은 재능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나열하여 문장을 만드는 일, 문장을 엮어 문단을 짓고 문단을 쌓아 글을 세우는 일. 어찌 보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단순한 작업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문제는 글 속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사고와 지력과 철학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인내하고 거듭해야 오롯이 한 사람의 세상이 담길 터이다. 글쓰기 천재라고 해서 지겹게 반복하는 사색의 과정을 건너뛸 수 있을까. 닮고 싶은 작가들이 살아온 세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여정이 짧지 않았다. 한순간도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을뿐더러 글을 지어낼 씨실과 날실을 가닥가닥 모아 풍성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수많은 가닥의 씨실과 날실을 모으려고 아마도 천근만근의 엉덩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맞다. 글은 재능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 그리고 글을 쓰는 재능은 무거운 엉덩이에서 나오는 게 틀림없다.   

 

중년이 넘어 시작한 글쓰기라 조급했다. 가벼운 엉덩이를 앉히지 못한 채 그저 재능이 없다고 한탄만 하기도 했다. 물론 글은 재능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믿는다. 그래도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 재능도 있고 엉덩이도 무겁고.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인가. 모차르트는 엉덩이보다 재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차르트가 천재라는 사실을 직감한 아버지에 끌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연주하고 작곡을 공부했으니, 그 세월이 또 무거운 엉덩이를 대변할 수도 있겠다. 이제는 현실과 영화는 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살리에리처럼 마음 한쪽이 아리다. 지금도 천재를 갈망하고 있다. 글을 가뿐하게 쓰는 재주가 있기를 바란다. 물론 만족할 만한 글을 쓸 때까지 멈추지 않고 해볼 생각이지만, 엉덩이가 무거운 천재이길 바란다. 천재의 무거운 엉덩이를 가지려면 쉬지 않고 나를 글쓰기 전쟁터로 내몰아야 할 터이다.    


사실 <천재의 엉덩이>를 쓰면서 내가 글쓰기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게 돼 좀 짜증이 났다. 지난주부터 지금까지 무척이나 바쁘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글 쓸 시간이 없어 제목만 써 놓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간신히 쓴다. 그런데 이런! 글이 중구난방이다. 이렇게 시간은 없는데 글을 꼭 써야 하는 상황에서 천재적으로 생각의 불꽃이 팍팍 터져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손가락 움직이는 대로 자판을 쳐댔는데 신춘문예 당선작품이 휘리릭 써지는 그런 내공은 언제쯤 발휘할 수 있을까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글 잘 쓰는 사람도 이렇게나 많은 세상에서 나는 그야말로 명함이나 내밀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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