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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n 10. 2021

한 끗 차이

글 좀 잘 쓰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4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이다. 처음에 작가는 ‘꽃은’이라고 썼다고 한다. 나중에 ‘꽃이’로 바꿨는데, 본인이 쓴 에세이집『바다의 기별』에서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직접 읽지는 않았다) 국어 문법은 잘 모르지만 ‘은’은 보조사이고 ‘이’는 주격조사이다. 보통 ‘은’을 주격조사라고 알고 있다. 영어에서 주어는 ‘은, 는, 이, 가’로 해석한다고 배운 탓일 수도 있다. ‘은’은 어떤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거나 다른 것과 대조할 때 쓴다. 아니면 그 대상을 강조할 때 쓴다.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알게 됐다.     


김훈 작가가 첫 문장의 조사 하나로 담배 한 갑을 다 피워가며 고민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나는 작년 한 해 번역 학원에서 번역을 배웠다. 글이 쓰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고, 마음에 드는 글을 못 써서 안절부절못했고, 글쓰기를 배울만한 곳을 찾느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남이 쓴 좋은 글을 번역하다 보면 부족한 어휘력과 표현력을 향상할 수 있으리라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더불어 배운 영어도 좀 써먹고 나아가서 돈벌이까지 할 수 있으면 ‘1석 몇조냐?’ 하는 계산까지 했다. 사실 번역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번역 학원 자체 방학을 제외하고는 1년 동안 열심히 했다. 글을 쓴다는 일은 내 글이나 남의 글 번역이나 별반 차이 없이 즐거웠다. 과제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수업도 (물론 온라인 강의로 많이 했지만) 빠지지도 않고 잘 해냈다. (앗, 초반에 치질 수술하느라 2주 빠졌다. 치질 수술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진짜 아프다. 흑흑)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애써 찾아서 어렵게 사는 사람의 전형. 굳이 번역을 배우겠다고 내 돈까지 들여가며 고난의 시간을 보낼 일이냐는 거다. 천생배필을 찾아 주려는 중매쟁이처럼 한글과 영어단어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컴퓨터 자판을 눌렀다가 백스페이스를 눌렀다가 다시 컴퓨터 자판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과제를 하면서 매번 좌절했다.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는 문장을 붙들고 머리카락을 뜯었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감성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말이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는 통에 ‘이 말이 왜?’라는 의문으로 화가 날뻔했단 ‘말이다’. 갖은 번역서와 에세이, 소설에서 ‘말이다’라는 표현을 읽게 되면 ‘이 사람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는 거야?’라고 증거물을 손에 들고 강사한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전문가 말을 믿으며 속앓이로 끝낼 수밖에.     

한번은 원문 작가가 세 문장에 걸쳐 ‘once I’라는 말을 반복해 썼다. 나는 작가가 똑같은 표현을 세 번 반복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한 때 나는’이라는 똑같은 표현을 세 문장에 걸쳐 번역했다. 결과는 뻔했다.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 안 되기에 한 번만 쓰라는 첨삭을 받았다. 나는 작가의 문학적 세계관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쓴 대로 세 번을 똑같이 번역해줘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강사는 번역은 다르다고 대답했다. 역시 배우는 처지이었기에 수긍할 수밖에.    


내 글 쓰는 일과 남의 글 번역하는 일이 이렇게 다른가? 원작 소설에서 주어, 동사가 없이 완전하지 않은 문장 ‘Late in the year’를 ‘한 해의 막바지’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한 해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같은 완전한 문장으로 번역해야 한다든지 (원작자는 주어, 동사 몰라서 그리 썼냐고요.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원문에 있는 영어단어 ‘악당’보다는 문맥상 ‘녀석’이 더 낫다든지 (개인의 취향 아닌가요. 문맥상 ‘악당’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등 이런 첨삭으로 나는 점점 번역의 미궁에 빠졌다.    


물론 배운 점이 더 많았다. 문장의 호응, 정확한 피동 문장 사용, 번역 투 문장 지양 등 글을 쓰면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지금도 많이 헷갈리고 잘못 쓰기도 하지만.     


번역 공부가 내게 약이 됐는지 독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번역 공부 후 스트레스 장애’랄까? 번역을 배우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글을 쓸 때마다 김훈 작가처럼 한 글자를 두고 고심하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김훈 작가와 동급선상에 나를 얹으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느 날은 ‘존엄’이라고 쓸까, ‘존엄성’이라고 쓸까를 두고 하루를 보낸 일도 있다. 그 '성'이라는 글자 하나가 그렇게도 시간을 잡아먹는 아귀였는지 몰랐다. 이 문장을 쓰고 또 고민한다. '아귀'라는 단어를 여기에 써도 되는 건가? 찾아보니 국어사전에 '어쩌고 저쩌고 .......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데. 아니면 물고기이거나 귀신. 쓰는 내내 이 말은 안 되고, 저 표현은 이상하고, 명사 주어도 어색하고 등등을 생각한다. 한글 문서의 빨간 줄도 점점 무서워졌다. 빨간 줄 강박증이 생길 지경인데, 아무리 다른 단어로 고쳐 써도 빨간 줄이 안 없어질 때가 있어서 목덜미 잡는 일도 많다. 누가 ‘에세이랑 번역은 달라요.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빨간 줄은 꺼지라고 하세요’라면서 궁딩이 팡팡 두들겨줬으면 좋겠다. (역시 궁딩이도 빨간 줄이다. 표준말은 궁둥이다. 정감 상 ‘궁딩이’라고 쓰면 안 되느냐고요) 어쩌다가 쓰게 되는 문법적 파괴를 ‘시적 허용’처럼 ‘수필적 허용’으로 관대하게 봐 줄 수는 없는 건가? 그냥 은어도 쓰고 비속어도 좀 끄적거리고 요즘 유행어도 남발하면서 내 마음대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반항심이 생긴다. 이런 내가 민서영 작가의『쌍년의 미학』이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김연수 작가의『소설가의 일』 내용에서 ‘이 뭥미?’, ‘ㅋㅋ’, ‘ㅠㅜ’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쌍년’의 이야기든 ‘여성’의 이야기든 아니면 ‘엄마’의 이야기든, 무엇이든 글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건 꺼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삶의 간극이 생겼다는 뜻일 터이다. 나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시간의 틈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한 줄 한 줄 타인에게 들려줄 편지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일분일초는 영원히 타인에게 이해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접점 없이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일일지라도 글을 써야만,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격랑의 마음을 쓸어내리는 사람이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하고 싶은 말들이 내 몸에 쌓여 내뱉지 않고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그때 쓴다. 비 오는 날, 물을 흠뻑 머금어 수채화같이 여릿한 산등성을 볼 때도, 오디세우스가 살아남기 위해 폴리페모스에게 꾀를 내어 둘러댄 자신의 이름 ‘아무도 아닌’이 딱 내 이름 같을 때도, 사랑할 때도 미워할 때도, 그래도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하루가 벅찰 때도 나는 끄적이고 싶어진다. 이렇게 논리의 적용 없이 그냥 쓰고 싶을 때, 뭔가를 느끼는 대로 기록하고 싶을 때 맞춤법이나 문장의 호응이나 표준말, 이딴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주절주절 말 나오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쓰고 싶다.     

아, 이렇게 막 징징거리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지는군.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럼 일기를 쓰세요’. 인터넷 뉴스판을 뒤적이다 보면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댓글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내용이 너무 개인적일 때 달리는 댓글이다. 아니면 개인적인 이야기라도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는 저자나 작가를 비꼬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독성이 떨어지고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 글에도 그런 댓글이 달린다. 여기서 나의 동공이 흔들린다. 이왕 쓸 거면 남이 읽을 글을 써야지. 나만 읽고 말 일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누군가에게 읽힐 글이라면 가독성을, 기본규칙을, 독자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혹시 또 알아? 내가 쓴 글들이 어느 출판사의 편집자‘님’의 눈에 들어 출간이라도 된다면, 편집자‘님’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그러니까 편집자‘님’의 일거리를 줄이도록 정제한 언어로 규칙에 맞게 써야지.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쉬르의 언어철학까지는 모르더라도 ‘이’냐 ‘은’이냐는 한 끗 차이로 언어의 기표가 달라지면서 사실의 세계와 의견, 정서의 세계로 갈라진다는, 그렇게 놀라운 언어의 신비함이라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한 끗을 위해 겁을 먹고 눈치를 보고 몸을 움츠리면서 국어사전을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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