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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Oct 14. 2022

어른의 공부

어른의 공부(1)

  친구와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친구가 물었다. 시험기간 겹쳐서 네 생일 때 얼굴도 못 보는 거 아니냐고. 고마운 말이었다.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은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고 생일날 못 보면 서운할 것 같다는 뉘앙스가 고마웠다.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두뇌는 짧은 시간에 여러 정보를 처리하는 슈퍼 컴퓨터랄까? 그 순간, 나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인풋 데이터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저번 기말 시험 기간이 떠올랐다. 아, 다시 생각하니 그때의 아찔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이 또한 인풋 데이터로 변환되어 들어갔다. 뇌는 인풋 데이터를 조합하며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아웃풋 데이터를 준비 중이었다. 그중에는 생일이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 데이터도 알게 모르게 섞였을 것이다. 


"볼 수 있지. 약속 생기면 미리 조절해서 다른 날 공부해두면 되니까. 오히려 그래야 더 집중력 높아지고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더라."


  친구가 묻고 대답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났을 때 내 입에서는 예상과 다른 답변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뇌는 아웃풋 데이터를 생성하기 바로 직전에 어떤 것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시험 기간의 빠듯한 시간보다 고마움에 우의 점수를 부여한 나의 뇌는 내가 살아온 행동 방식에 대한 패턴 분석 데이터와 기질 데이터를 종합하여 그런 아웃풋을 산출했으리라.


"너 어른이네."


  또 찰나의 시간 뒤 돌아온 답변이었다. 이 또한 예상 못한 친구의 답변이었다 - 이것이 대화의 묘미이긴 하다. 거기에 덧붙여 친구는 가볍게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쓰다듬는 행동을 했다. 대견하다는 듯이.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친구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어른의 공부라고. 애들은 그런 기회 생기면 놀 궁리부터 하는데 말이야."


  어른의 공부라는 익숙한 두 단어가 하나의 구로 안착하며 낯선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속에 내포된 의미가 '나이 든 사람이 하는 공부'의 의미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표면적 의미로 해석해 보면 그저 늙깍이 공부겠거니 싶지만, 나도 사십이 넘어서야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수순처럼 꼰대는 될 수 있지만, 어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나는 친구의 말에 크게 웃었다. 친구의 말대로 공부 분야에서는 조금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책임감을 갖고 다 이루어 내야겠다는 마음 자세가 바로 어른의 자세였던 것이겠지 싶었다. 안 그래도 기질상 책임감 지수가 높은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 책임감이 더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긴장도도 높아지고 스트레스 지수도 올라갔다. 좀 줄일 필요가 있었지만, 이것이 모든 분야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분야에서만 책임감 지수가 높아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완전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 같았다. 한 개인의 꿈을 어른이라고 했을 때 - 종종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었다 - 어른이 되기 위한 과목을 세분화해서 점수로 매긴다면 어느 곳은 구멍이 생기는 곳이 반듯이 생기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아직 어른이 되어 보지 못한 지금의 나로서는 이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성이나 인품 과목에 구멍이 뻥뻥 생기는 상상이 저절로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니 말이다. 

  

  친구의 말에 일리 있는 말이라고 한참을 웃었지만, 정말 내가 어른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래 이 과목에서만 있다고 해주지 하는 후한 인심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나이에 하는 공부라서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이 생겼다. 거기에는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의 책임이 더 붙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욕심을 부리자면 아이가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사춘기 아들은 알았다면서 서둘러 내 입을 막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로서 형편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괴감이 들었다. 정말 아이를 낳고 수도 없이 하게 되는 생각이었다. 엄마 사표는 어디다 내야 하는 것인지. 일처럼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참 많았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왔지만 순간순간은 참 힘들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역할은 열심히 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좋은 보상 일리는 없었다. 어떤 작가님이 말했다. 엄마는 집안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주부로 월급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내 계획하에서 움직이는 집안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요리하는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런 생각들은 일시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지만, 집안의 일도 어떻게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정의 내리는 것도 사장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어른의 공부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남편 보다도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된다. 그래야 아이에게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부에 때가 있다는 생각을 지금의 나는 이렇게 절실히 느끼는데. 말이 꼰대 발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말은 참 무용하기만 하다.


  곱씹어 볼수록 '어른의 공부'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그래도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삼십 대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게 지나갔고 나는 사십 대를 살고 있다. 먼 훗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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