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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Nov 22. 2022

영화 <시> - 아네스의 노래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나의 오랜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오래도록 가슴 먹먹해지는 시 한 편이었다.

이창동 감독님은 시도 참 잘 쓰시는구나, 싶다.


영화에는 김택 시인이 시 교실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영화 <시>는 특이하게도 문학 장르인 '시'를 소재로 했다. 시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어떻게 스토리화 하여 보여줄 생각을 했을까.

 

<아네스의 노래>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닌 화자가 시를 끌고 간다. 시인은 사건을 지켜본 사건 밖의 인물(영화 속 미자)이지만, 시인은 기꺼이 자신이 그 인물이 되어 아네스의 입장에서 진솔하고 담담하게 시상을 펼쳐나간다. 그래서, 시가 한층 깊어지고 큰 울림으로 먹먹해진다. 죽음을 앞둔 화자와 대비되는 현실. 아네스의 죽음과 별개로 해는 뜨고 해는 진다. 그런 이미지들의 대비에 먹먹해진다. 그리고, 아네스는 그 순간에도 남아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마지막 말을 전하면서 또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곳에서는 어떤 아픔도 없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

  

희망이 없는 현실은 무거운 옷을 입고 걸어가는 것 같다. 고단하고 아파도 벗을 수 없는 옷. 옷을 질질 끌고 걸어가는 중에는 햇빛의 따사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 모든 것이 가시처럼 느껴진다. 풀 한 포기조차 노래하지 않는다. 아네스는 희망을 본다. 다시 예전처럼 따사로운 햇살에 감동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하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작은 풀 한 포기도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아주 작은 것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해진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으라는 말이 나왔겠지만. 모르 파티, 메멘토 모리, 이런 말들도 자주 듣다 보니 식상해진다. 울림이 없어진다. 시는 무엇일까. 그런 일상적인 말들에 이미지를 입혀서 깊은 울림으로 감각하게 하는 힘. 시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들이 그런 것 같다. 아무 말이나 되지 않게 하는 힘. 똑같아서 잔소리로 듣지 않게 하는 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시 속의 화자가 된 것 같다. 죽음의 순간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시 작은 것들을 보게 된다.


비가 올 것 같다. 어제 내 곁에 머물던 햇살 한 줌을 떠올린다. 등을 어루만져주던 따스한 햇살의 감각이 또 하루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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