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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예 Feb 01. 2021

'원룸'

1월 31일. 오늘로서 벌써 세달 치 월세가 밀렸다. 코로나 시국의 불황으로 하고 있던 알바 자리를 모두 잃었고, 월세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사라졌다. 내 처지도 딱하지만, 세달 월세의 적지 않은 액수를 떠올리자 내 월세를 받아서 생활해왔을 집주인의 생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를 올 때 딱 한 번 집주인을 뵜는데,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인상이었다. 낡은 외투에 뽀글 파마를 한 집주인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닌 것 같았다. 내 머리 속에는 ‘어린 학생에게 어떻게 월세를 독촉하나’ 생각하고 마음이 약해져 그저 월세가 입금될 때까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용돈을 부탁하는 대신 생활비를 아끼고 있을 집주인 할머니의 모습이 둥둥 떠다녔다.

 

이런 집주인 이미지를 창조해내자 어떻게든 월세를 벌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그 후 몇 주간 공사장 일용직 노동, 건물 청소, 피씨방 야간 알바 등등 수없이 많은 일을 했다. 붙잡고 있던 공부도 미뤄두고 오직 일에만 매진했다. 라면으로 배를 채워가며, 잠도 아껴가며 만들어낸 세달 치 월세. 이 돈이면 시장에서, 미용실에서 쌈짓돈을 아껴왔을 집주인 할머니가 좀 더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날 밤은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뒤 집을 계약한 공인중개사 앞을 지나며 우연히 집주인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나와 같은 건물의 다른 집을 보러 온 사람과 함께 있는 듯 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나는 할머니께 월세가 밀려 정말 죄송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사실 자신은 집주인이 아니고 집주인 대신 건물 세입자들을 상대하는 중간관리인이라고 말했다. 그럼 진짜 집주인은 누구인가. 할머니는 오만 가지 노동으로 퉁퉁 붓고 상처난 내 손을 가만 보더니 소리죽여 ‘한 가족이 이 건물 모든 방을 다 가지고 있다’고 속삭였다.

 

집에 돌아와 살펴본 등기부등본에는 성이 같고, 심지어 이름의 한 글자도 모두 같은 사람 네 명이 차례로 건물을 소유했던 기록이 나와 있었다. 이 건물의 수많은 방이 모두 한 가족의 것이었다니. 그들은 내가 월세를 밀리든 말든, 그 정도 돈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들어 내 좁은 방, 곰팡이 핀 벽, 악취가 올라오는 하수구를 쳐다봤다. 옆방에서는 기침하는 소리, 통화하는 소리까지 다 들려왔다. 갑자기 감옥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잔인하게 노동해서 겨우겨우 죄를 갚아 보지만, 결국 석방과 자유는 요원한 감옥.

 

집주인은 감히 그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다리 가장 높은 곳 즈음에 있는 것이다. 중간관리인이 집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현대판 「목걸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내가 가엾고 딱했다. 내 착각이었고, 내가 선택한 고생이고, 무엇보다 내 가난의 죗값이니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날 밤 꿈 속에서 나는 거대한 사다리를 오르고 또 올랐다. 사다리 끝에는 집주인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끝끝내 사다리 꼭대기에 다다랐고, 집주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햇빛이 너무 강렬해 나는 사다리를 쥐고 있던 손을 놓쳤고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공의 이야기로, 이혜미 기자님의 「착취도시, 서울」을 읽고 느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착취도시, 서울」은 지난 여름 머니투데이 인턴으로 일하던 중 읽게 된 책입니다. 정치부에서 일하며 국회를 출입했는데, 들고 있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가 저자인 이혜미 기자님을 직접 마주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자님께서 제가 들고 있던 책을 보셨던 것 같은데, 너무 신기한 마음에 좋은 책 감사하다는 간단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벌써 몇 달이 지났네요. 주거와 빈곤에 대한 두 가지 관심사를 연결하게끔 해준 귀한 책입니다.

 

**상대적 약자가 강자에 대한 연민과 우려를 느끼는 역설적인 현상을 주변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약자로서 차별 받은 경험을 내면화한 주체가 자신보다 강하고 풍족한 사람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연민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때때로 느끼는 감정인데요. 이 감정 자체가 나쁘다, 그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걱정과 공감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1) 차별과 배제로 인한 고충, 2) 내면화된 약자성으로 인한 끊임없는 감정 노동 (자기 연민과 이로부터 번진 타인에 대한 연민), 즉 이중의 굴레가 씌워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윗글에서도 자신보다 강한 타자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가 결국 이로 인해 자신을 더욱 동정하게 되는 사회적 약자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내면’은 약자들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과한 존재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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