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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 Nov 27. 2020

다른 남자 같은 이별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걸 더 잘합니다

"어머니 오신다고 해서 집도 치워야 하고 빨리 가봐야 해"


뭐라고? 지금 눈앞에 7개월간 사귀어온 남자가 헤어지자고 만나서는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그래도 한때는 나에게 너무 좋다고 하던 사람 아닌가.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며 마구 퍼붓고 싶었지만 그냥 거기서 그만두었다. 더 만나보자고 좀 잘해보자고 말하기엔 헤어짐에 빠삭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누군가에게 열과 성을 다하기엔 그럴 에너지가 너무나 부족한 삼십 대 중반이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떠오르는 한 장면. 어라? 나 이 말 언제 들었었는데?


"엄마 오신다고 해서 집도 치워야 하고 빨리 가봐야 해"


거의 10년 전이다. 3년을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지던 날, 그도 꼭 같은 말을 했다. 왜 이 두 남자들이 모두 나에게 엄마 핑계까지 대가며 눈앞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2011년의 그 대사가 2017년에도 사람만 바뀌어 발화됐으니 신기했다. 아마도 그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쩌지 못하는 이유를 내세워야만 내가 그 시간을 빨리 끝내줄 거라 생각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효과는 확실했다. (가라, 이 자식들아!)


두 남자의 그 말에 나는 실연당한 비운의 여주인공 역할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밥을 안쳐놓고 나왔어"나 "빨래 돌려놓고 나왔어"가 아니어서 오히려 감사했다. 결혼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인물들이었지만 '엄마'라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다니 곧 차여서 다행이라 여기게 되었다.


3년이든 7개월이든 그래도 만나는 동안 행복했던 추억이 많았는데 마지막 저 대사 때문에 한 명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다른 한 명이 세트로 달려 나온다. 달콤하기보다 엄청나게 쓴 초콜릿 두 개가 한 상자에 같이 들어 있는 것 같달까.



헤어질 땐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아무리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한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상처 주지 않으면서 그만 만나자고 말하기가 쉬울 리 없다. 한 번씩 뉴스에서 헤어지자는 상대에 원한을 품고 스토킹도 폭력도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두려워진다. 왜 나쁜 패만 쥘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내 머릿속을 나도 모르겠지만 좋은 패만 골라 들어올 리도 없지 않은가.


거절당하고 부정당하는 일이 있어도 상처 받지 않으려면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싫어졌다고? 괜찮아, 나는 내가 더 사랑해주면 돼" 하는 정신 승리의 논리인데 그게 쉽지 않아서 문제인 거다. 좋아하던 사람과 어제 헤어져도 오늘 아무렇지 않게 웃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무뎌지는 것인지 전처럼 오래 슬프지도 않는 것 같다.


어릴 때는 헤어지는 일이 두려워서 누군가를 사귀는 걸 고민한 적이 많았다. 지금은 헤어지는 건 전혀 걱정이 안 된다. 뭐 처음에는 황당하고 조금 지나면 슬프다가 나중엔 조금 외롭고 말 것이다. (전문가인 줄! 맡겨만 주세요!) 사실 이제 헤어지는 것보다 만나는 것 자체를 시작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사람을 만났던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하하! 그런데 딱히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진짜 문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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