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살았던 우리집은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한쪽 코너에 단독으로 있었다. 우리집 쪽으로는 누군가 올 리가 없어서 그 앞은 우리집 전용공간처럼 쓰이곤 했다. 바로 그날은 그래서 다행인 날이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현관 밖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우리집이 갑자기 이사를 가나 했다. 그런데 더 가까이 가서 보니 하나같이 전부 내 물건이었다. 종류별로 잘 내다 놓은 게 아니라 그냥 다 내던져진 상태로 쌓여 있었다. 옷, 책, 가방, 가위, 이불, 베개, 펜, 풀 등 모든 것이 마구 뒤섞인 채로,말 그대로 쓰레기 산이 되어 있었다.
방청소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부모님께 매일같이 혼이 났다. 바닥은 발 디딜 틈조차 없고 문도 잘 열리지 않는 정도였다. 그렇다, 그날은 벼르고 벼르시던 아버지가 특단의 조치를 하신 것이었다. 그날 복도에 펼쳐졌던 광경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내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그 뒤로 나는 방청소를 잘했어야 하지만 그때보다 덜할 뿐 계속 혼이 나고 치우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집이 아닌 - 기숙사나 어학연수 시절 홈스테이나 회사 책상 같은 - 곳에 나의 공간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남들 눈에 띄는 곳은 깨끗하게 보여도 서랍 속, 옷장 속, 심지어 가방 속은 여전히 '왓 어 메스!'였다.
우연히 같은 요가원에 다니게 된 출판계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호더가 화제에 올랐다. 처음에는 남 얘기로 깔깔 웃으며 듣는데 뭔가 섬뜩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 방이 떠오는 것이다. 에이, 이제 많이 깨끗하잖아, 그런 정신 이상자 수준은 아니지 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그날 이후 돌아온 주말, 내 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나, 호더인가? 점검 결과는 더럽지는 않았다. 다만 서랍 속이, 옷장 속이, 그리고 방 한구석이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특별한 품목을 모아두어 그랬다면 오히려 취향이야! 하고 어필할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딱 봐도 쓰지 않는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뭐랄까, 리틀 호더 정도랄까.
거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일에 대비하면서 사는 나에게 무언가를 버리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시계는 내가 스무 살 첫 유럽여행 때 산 건데 어떻게 버려' '이 옷은 이번 여름엔 못 입었지만 내년 여름엔 입을 수도 있어' '이 가방은 언젠가 신발이 젖었을 때 신발주머니로 쓰면 정말 좋겠다' 이런 식으로 어떤 물건을 갖고 있어야 할 이유를 오조오억 개 열거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5년 전 헤어진 친구가 준 목걸이가 아직까지 서랍 속에 있는 걸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보자마자 내버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판에 나는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 조용히 다시 서랍을 닫았다.
갑자기 나는 무서워졌다. 더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물건이 더 많은 이유로 쌓일 거였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수록 -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 더 많은 만일에 대비할 거였다. 마흔을 앞둔 나는 호더의 싹수를 잘라버려야 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두 달, 정말 많이 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중 가장 잘했다 하는 일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수납장 겸 책장 네 개를 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놓을 공간이 생기면 그것이 곧 그 공간을 무언가로 잔뜩 채우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제일 먼저 한 일이다.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물건들을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제자리를 찾아주고 나니 왜 책장이 네 개씩이나 필요했었나 했다.
시험날 미역국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은 수준의 미신이랄까. 쓰지 않는 물건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좋은 기운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좋은 기운이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두 달간 리틀 호더는 물김치처럼 시원한 '버림'의 맛을 봤다. 그것만으로 좋은 기운이 들어온 게 아닐까.
쓰지 않는 물건을 찾아내 없애버릴 때마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고 눈도 트였다.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버릴까 고민하는 게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이 버리는 게임의 퀘스트는 내가 정한다. 추억과도 싸우고 지레 하는 걱정과도 싸운다. 그 싸움에서 이기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릴 수 있다.
덧. 버린다고 썼지만 나는 쓰레기 만드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건들을 '당근마켓'과 '아름다운 가게', '알라딘'을 이용하여 다른 분들께 보냈다. '당근마켓'은 말로만 듣다 이번에 앱을 다운받아 보았는데 정말 편리하다. 위치 기반이라 근처에 사는 분들과 거래할 수 있고 서로 평가 점수를 주어 매너 있는 태도를 유지하게 해 준다. 무료 나눔을 많이 했는데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씀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너무 좋다. 강추!
'아름다운 가게'에는 한두 번 입은 옷들과 사놓고 거의 사용하지 않은 가방 등을 보냈다. 재판매가 될 수 있는 상태의 상품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가게'는 기부 영수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다. 책은 거의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가져갔다. 수거 서비스도 한다지만 웬만하면 택배를 보내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 박스 및 충전재 등 쓰레기, 배송업체의 인력난, 배달 차량의 매연 모든 게 다 좋게 생각되지가 않기에 - 노력 중이라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러 직접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