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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 Nov 21. 2020

남자들이 가만 뒀을 리가 없는데

그걸 칭찬이라고 하세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드문 나이, 만나던 사람만 만나게 되는 나이. 지금 나, 바로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의 인간관계다. 일이 아닌 사적인 관계로서는 더욱 없는 일이겠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한 시간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과의 한 시간에 필요한 에너지를 비교해 생각해보라. 당연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편안하다. 일단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거꾸로 상대는 나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되는 범위가 있다.


러닝 동호회 활동을 8년째 이어오고 있는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동호회의 특성 때문인지 놀라울 만큼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온다. 정말 살면서 한번도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황당한 사건, 사고도 꽤 많이 보고 겪고 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선보이는 무례함이다.


얼마 전 나이가 지긋하신 남성 분이 모임에 와 있었다. 그 전 주에도 나오셨다고 했지만 그날은 내가 참석하지 않아서 나는 처음 본 분이었다. 빠른 페이스 그룹을 먼저 보내고 나와 페이스가 비슷한 분과 뒤따라 달렸다. 어쩌다 보니 뒤풀이 장소에도 뒤늦게 갔는데 왜 때문인지 그 분이 앉아 계신 테이블에만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색했지만 그 자리에 앉았고 인사만 나눴다. 한참 앞자리에 앉은 분과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갑자기 옆의 이 분이 물으신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결혼 하셨어요?"


이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본 건 아니었다. 초면에 묻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최근에는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서인지 거의 없었다. 결혼 여부를 절대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치면 얼굴도 서로 익히고 편해지니까 그쯤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 등은 서너 번 만나다 보면 대화 속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못했죠. 하하."


웃으며 넘겨버렸다. 큰 뜻 없이 궁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나는 사회적 인간이니까. 그렇게 대답했다.


"남자들이 가만 뒀을 리가 없는데..."

"네...?"


이게 무슨 소린가? 찰나의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남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거라니? 이게 칭찬인 건가. 칭찬을 왜 이렇게 하나. 그만큼 내가 매력이 있다는 소리인가. 그런데 왜 기분이 별로지. 칭찬이니 감사해야 하나. 순간이지만 찝찝한 기분으로 그 순간을 넘겼다. 그 뒤로도 비슷한 발언을 몇 번 더 하셨지만 못 들은 척 다른 이야기를 했다.


"여름 님은 몇 키로 등록하셨어요?"


며칠 후 그 모임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화창에서 언택트 마라톤 대회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문제의 그 분이 나를 콕 찝어 질문을 하셨다. 굳이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내가 궁금한 걸까. 순간 며칠 전의 불쾌함이 되살아났다. 남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아주 냉정하지만 아죽 욱하게 분석됐다.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뭘 가만 두지 않는다는 말인가. 가만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갑자기 여성을 대상화한 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분이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있었다.


그 대화창에서 나와버렸다. 기분이 나쁜 일, 혹은 나쁠 일을 만나면 피해버리는 성격 탓에 도망치듯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뒤풀이에서 들은 그 분의 발언을 모임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그분께는 앞으로 조심하시라 한마디 해줬어야 속이 시원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곧 모임 사람들이 따로 연락을 해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내가 참석하지 못했던 첫 참석 날부터 말이나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며칠 속이 상해서 동호회 게시판에라도 써볼까 한다고 했더니 친구 중 하나가 어차피 '아재'나 '대부분 남자들'은 공감 못하고 너만 엄청 깐깐한 여자 취급받는다고, 뒤에서는 분명 저러니 아직 결혼 못했다고 씹힐 거라고 한다. 같은 여자니까 더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보고 친구니까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일 텐데 솔직히 더 속상하고 좌절했다. 결국 조용히 있으라는 말 아닌가.


아무 의도 없이 했다는 한마디, 우연치고 너무 자주 반복되는 스킨십, 술에 취해 다시는 안 할 거라는 실수들. 다 그런 것 아닌가. 다들 아무말도 안 하고 넘어가주니 그런 말과 행동들이 돌고돌아 누군가는 또 이런 일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었을 때, 저 놈 하나 잡아봐야 또 나올 거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 또 나와도, 다는 못 잡아도 내 눈에 띈 그 한 마리를 강스매싱으로 때려잡는 시원함은 느끼고 싶다. 빠그작!!



덧.

깐깐한 여자, 결혼 못한 여자라는 말 들으면 안 좋은 건가. 솔직히 땡큐다. 부드럽고 사근사근하다는 것만 좋은 건가. Basically! 내가 왜 좋은 여자가 되어야 하나. 누구 좋으라고 부드럽고 사근사근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결혼 못한 게 왜? 물론 내 주변에도 결혼한 자신을 '승자' 또는 '위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도 나를 보며 '학교 때 나보다 공부는 잘했지만 결국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네?'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친구도 있는 듯하다. 나는 사회적 인간! 그런 친구 앞에서 오히려 더 극적으로 '나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다'며 부러운 척을 해본다. 정작 난 그 친구가 오직 '결혼', '출산'으로밖에 우월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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