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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컬처 Jul 01. 2020

나는 그렇게 조직문화 담당자가 되었다

돌고 돈 퇴사의 끝, 결국 쓸모없는 일은 없었다

나는 조직문화담당자다.

회사에서는 컬처 매니저라 불린다.


이 곳에 온 지 3년 차, 만 2년 하고도 4개월 정도 되어간다. 사회에 발 디딘 건 10년 차, 올해의 6월이 지나고 만으로는 딱 9년, 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솔직히 나도 내 이력서를 보면 이게 뭔가, 그동안 뭐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멀리 그리고 많이 돌았다. 대학시절부터 치면 더더욱 많이 돌았다.


나는 일반적인 HR 자원이 아니다. 대학에서는 경영과 영어를 복수 전공했지만, 경영 전공 공부를 하면서는 인사나 조직 쪽으로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마케팅 트랙을 밟고 졸업했다. 심지어 영어는 아직도 내가 왜 복수 전공으로 선택했는지 미스터리일만큼 인생의 후회되는 선택 베스트 3에 들어간다. 오리지널 코리안인 나는 재외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그 갭을 메우기 위해 허덕였다.


그렇게 졸업하고 간 첫 직장에서 브랜드 전문지의 에디터로 거의 3년을 일했다.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업무 습관 들이기 외에도 이 세상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웠다.

나의 주된 업무는 좋은 브랜드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정의하고 그에 맞는 브랜드를 발굴하고 취재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는 일이었다.


또한, 우리는 좋은 브랜드를 연구하는 만큼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자체, 리더십과 팔로워십은 물론, 좋은 브랜드의 정신이 그 브랜드를 만드는 조직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었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브랜드인지
무엇이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좋은 조직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은,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를 아주 혼란스럽게 했다.


'우리는 좋은 브랜드인가?'

‘우리는 좋은 조직인가?’

‘우리는 좋은 리더를 가졌는가?’

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내가 쓰는 이 글이 진실성 있는가?’

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상황에서 자력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있는가?’

답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애증이 가득한 첫 회사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선배들이 차례로 떠날 땐 웃으며 배웅해주고 화장실에서 눈물 한 번씩 닦고 오곤 했는데, 막상 내가 떠나니 왜인지 눈물보다 후련한 웃음이 먼저 나왔다. 50일 정도만 더 참고 더 일했다면 만 3년을 가득 채운 이력서 상 한 줄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이런 건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후회 없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갖다 바치며 일했던 곳이었다.


그렇게 퇴사하고 석 달을 자취방에서 잠만 자다가, 조금 체력이 충전된 것 같아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의 나는 글로만 썼던 내용들이 실제로 작동할지 몹시 궁금한 상태였다.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현장 속에 있길 원했다. 두 번째 직장은 뉴미디어 광고 에이전시의 브랜드 매니저 포지션이었다. 홍보의 롤이 강했고 여기에 확장해서 자사의 브랜딩 역시 병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기존의 내가 알고 겪은 판과는 180도 다른 영역의 회사였다. 글을 쓰다가 난생 처음 보는 기술을 다루는 곳에 오다 보니 참 세상엔 신기한 것이 많구나, 난 뭘 하고 살았나 싶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내가 그냥 살던 대로 살았으면 전혀 만나거나 친해질 일이 없을 법한,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고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조직 규모 역시 첫 직장이 워낙에 작았던 곳이라 인원으로 비교하면 5배 정도 컸다.

 

참 재미있는 곳이었지만 내 일에서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말 그대로 이곳은 에이전시였고, 우리의 일은 곧 우리의 일이 아닌 곳이었다. 고객사 프로젝트 수행으로 회사 차원의 역량이 쌓이고 성장할 수 있지만, 또 이 작업을 우리가 했다고 우리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결국엔 고객사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었다. 또 론칭 시기가 아주 먼, 중장기 프로젝트들도 꽤 많아서 지속적으로 일 단위, 주 단위의 새로운 홍보 거리들을 발굴하는데도 꽤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부터 회사의 ‘빈곳’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돌봐야 하지만 누구의 업무나 롤로 하나 떼기는 조금 애매한 것. 창고에 아무렇게나 쌓인 짐들, 수북한 먼지를 입은 화분의 나뭇잎, 찢기고 방치된 사내 도서들, 여러 지문들로 본래의 때깔을 잃은 회의실 테이블 등.


나는 빈 시간 동안 빈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알려야 할 작업들을 이뤄내는 이들이 일하는 곳을 돌보고, 쓸고, 다듬었다.


그 다음은 업무적인 부분이었다.

관리 상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데 대부분이 본래의 업무로 바빠서 미뤄뒀던 일들. 이를테면 회사가 갖고 있던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들. 팀 내에서 기존 직원들끼리 구전으로 전해오는 그런 일들을 공식적인 보이스로 알려주는 일이 필요했다. 본래 직무기술서 상의 역할과 책임에는 해당하지 않은 업무였지만, 오히려 이런 업무에서 내가 일의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굳이 짜치는 일을 하냐고 했다. 하지만 난 외부로 우리를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공고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더 좋은 방향성을 갖고 우리를 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이런 짜치는일들의 모든 것이 내가 지난 직장에서 그럴듯한 문장으로 포장했던 인터널 브랜딩 임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기본적으로는 홍보성의 업무를 하면서 사이드로 이런 인터널한 활동들을 점점 더 확대하여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갖고 있던 좋은 문화적 모습은 더욱 살려서 운영해 나가고(사내 세미나, 도서, 게임룸, 사내 이벤트 등), 없던 부분들은 제안하고(복지 전반 기획 등), 빈 부분이 생기면 몸으로 메꿨다(사옥 이전 등). 초보적인 수준의 업무들이었지만,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할 때 그곳이 조금 더 따땃하고 재밌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 내가 일에서 보람과 성취를 찾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일을 계속 들리지 않는 벽에다가 설득하고 있었다. 내가 빈 곳을 메워나가며 그 일은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었고 관련한 수명 업무가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리더십의 서포트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정신적인 지지나 의사결정의 속도, 리더의 비전까지. 그리고 난 이런 인터널 브랜딩에서 다시 한번 최고 리더의 철학과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생각이 어떻게 조직에 스며드는지, 그것이 어떻게 조직의 자연스러운 일하는 방식으로 생성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첫 회사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로 난 멘탈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면 호흡이 가빠져서 눈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게 더 심해지면 공황장애라는 걸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신을 돌보지 않고 그대로 다시 일을 하다 보니 두 번째 회사를 다녔던 그 몇 년은 나에겐 깊은 슬럼프 기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면 살기 위해 기존 업무 외의 것들에 눈을 돌려야 했을 수도 있었겠다.


칭찬보다는 비판, 비판보다는 비난이 난무했던 첫 직장에서의 시간에서 나는 가뜩이나 기본 성정도 그러한데 더더욱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못된 습관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회사에서도 모든 일이 잘 안되거나 하면 자책하고 이불킥하는 일이 일쑤였고, 지금의 힘듦이 조직이나 잘못된 리더십 때문이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생각을 깨게 된 시간이 1년 3개월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었다.


당시 나는 다니던 회사도 회사지만 ‘조직’이라는 자체에 꽤 지쳐있었다. 하지만 조직을 떠나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8할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곳을 보게 되었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내가 복직한 그날은 마침 새해에 조직의 전체 비전을 다잡고 한 해의 로드맵을 그리는 시무식 날이었다. 시무식 후에 대표님과 경영지원팀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데, 나는 안타깝게도 시무식에서도 그 식사 자리에서도 앞으로 일을 해나갈 어떤 유의미한 가치도 동력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그 전과 같은 자리였고, 그 전보다 깊거나 변화한 고민은 없었고, 무엇보다 그 전보다 경영진을 비롯한 모든 이의 인상과 표정은 어둡고 사나웠다.


그리고 난 복직 첫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주책맞게 펑펑 울었고
새벽까지 이력서를 썼다.
그렇게 복직 한 달 후, 나는 이직을 확정 지었다.


1년 3개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한 달만에 퇴사를 선언하니 당연히 대표님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나 같아도 때려죽이고 싶었을 거라 지금도 이해하고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 나도 ‘살아야지’.


대표님은 이건 배신이라고 했지만, 배신도 서로 간의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글에는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여러 배경들로, 나는 이미 회사와 그에게 신뢰를 거뒀기 때문에 배신을 논할 만한 관계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의 비전을 미리 고민해주지 그랬냐, 여기서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지만, 나 역시 그 이야기를 지난 몇 년간, 그리고 복직을 한 첫 날의 점심식사와 그 이후의 개별 미팅에서도, 대표님뿐 아니라 심지어 부사장님께도 아주 여러 차례 강하게 어필했다. 대표님은 늘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 간단한 메일이나 다른 보고 자료를 보거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너무 바쁘니까 그러실 수 있지'라는 생각도 스쳤지만, 한편으로 이게 이 사람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구나 싶어 나는 그렇게 일상 속 작은 좌절 속에서 서서히 마음을 접었다.


첫 회사와 두 번째 회사를 겪으며 나에겐 회사를 선택하고 내 일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조직이 일하는 문화에 대한 중요성,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일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이 모든 걸 앞에서 끌고 갈 리더의 비전, 무엇보다 그 리더의 인간됨이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난 앞으로 내가 해나갈 일이 그 조직의 문화를 다루는 일(그 브랜드 자체로 사는 것)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자기소개서에 돌고 돌았던 커리어를 크게 '사람과 일'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엮어 왜 이 일들이 연관성이 있는지 적고,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어떻게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넘버링해서 기술했다. 이렇게 별 거 아닌 걸 구구절절히 포장하여 길게 쓸 필요가 있을까도 싶었지만, 딱 한 곳이라도 내 절실함과 진심이 닿는 곳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내가 남들은 전문가 레벨로 도약을 해나갈 연차에 다시 이 돌고 돈 커리어가 전혀 다른 직군으로 한번 더 돌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 그동안 했던 일들을 모아서 포트폴리오화를 시키고,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기획해서 실행하려 했는지 설명했다. 그렇게 어쩌면 운명처럼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고, 컬처팀의 첫 번째 멤버로서 없던 일들을 계속해서 벌리고 만들어 나가며 즐겁게 또 의미 있게 일하고 있다.


이렇게 돌고 돈 시간을 겪고나서 느낀 점은,
그렇게 돌고 돌아도 결국 내 일을 해 나가는 데에서
기본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본질이란 참 놓치기 쉽지만,
한편으론 어디서든 통하기 마련이다.


일을 시작한 지 10년 차에 비로소 이제 조금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 드는 지금,

왜 내 커리어는 이 모양인지 과거의 선택을 했던 내 손목을 자르고 싶었던 때가 무색하게도 사실 쓸모없는 일은 없었고 쓸모없는 회사도 경력도 경험도 없었다. 지난 시간에서 느낀 점은 참 많고, 내가 각각의 다른 업무를 해나가는데에서 통하는 몇 가지 지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직원이 몇 안 되는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서 나는 사회초년생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대표 직속으로 일했고 그래서 리더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겠지만, 나와는 다른 관점으로 고민을 하는 사람이 한 조직에 있다는 건 늘 신선한 충격이었다.


쌩 주니어 시절부터 임원급과 일을 계속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든 일은 설득하고 보고하는 비중이 꽤 컸다. 이 일을 어떻게 저 사람한테 먹히게 하지? 는 나의 늘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정리할 때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다. (그래도 늘 보고는 어렵고, 내가 보고의 달인이라는 것도 절대 아니다.)

 

업무 피드백 역시 대표들이 그리는 큰 그림에서 방향 제시를 받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경험 부족으로 나무만 볼 수밖에 없는 주니어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숲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주니어 레벨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이긴 하지만 리더십에 대해 고민했던 것도 지금 일에는 궁극적으론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 회사는 팀장급의 주간회의에 계속해서 들어갔고, 또 내 업무 특성상 팀장에게 바로 업무 요청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그들의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 왜 저러고 사나 싶은 '인간'도 있었고, 나도 저런 팀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분'도 계셨다. 미래의 내 모습을 비추어 보게 됐고, 업무에서는 어떤 리더십이 효과적인지를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또 내가 지냈던 각 회사의 대표들은 아주 극과 극의 스펙트럼을 달리는 분들 이어서,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온도 조절도 익힐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 하지 하는 리스트업을 해놓기도 했고. (물론 당연히 배울 점 역시 많았다)


맨땅에 헤딩했던 잡지사 에디터 시절에 특집당 MS 워드 기준 평균 80페이지씩의 기사를 쳐냈고(보통 잡지사들이 3-40 페이지를 쓰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반강제로 나도 모르게 글쓰기 트레이닝을 했다. 글쓰기는 내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일에서 유용하다. (그리고 그 회사를 퇴사를 하고 글쓰기가 지겨워진 나는 글을 손에서 놓았고 점점 실력이 퇴보를.........쩜쩜..)


게다가 극악무도하게도  글은 취재만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특집을 위해 적게는 30, 많게는 최대 80 정도까지의 책을 소화해야 했다. 아는  없으니 구글링은 덤이었다. 그럼에도 공부가 모자라 출근  혼자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습관은 어느정도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업무 관련한 자료를 틈만 나면 꾸준하게 찾아 헤매게 되었다. 업무임에도 결국 의 성장을 위한  영감과 인풋을 주는 일이다.


취재를 위해 다양한 산업군과 다양한 사람과 컨택했던 경험으로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업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쌓게 되었다. 뻔뻔함은 덤으로 얻었다. 또한 해당 잡지의 특성상, 만나는 사람들은 어딘가의 대표나 최소 팀장 이상 등 기업에서는 보직자였고, 교수 등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그들의 시간과 경험을 투자해 얻은 지혜를 나는 날것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곳에서의 가장  수혜는 경청의 습관을 꼽겠다. 취재원의 이야기를  새겨들어야 글을   있었고, 한편으로는 들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야 했다. 이때 터득한  가지 스킬은 비단 인터뷰뿐 아니라 직장생활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취재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굳이 끌어내지 않으려 노력해야 때가 많다는 .


광고 에이전시의 브랜드팀에서 일했던 때의  수확  하나는  일을 내가 찾아 하는 버릇을 들인 점이다. 아무도 전반적인 업무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고,  R&R 주어진 업무는 하루 8시간  5 40시간을 채우기엔 모자랐기 때문에  시간을 채워낼 일들을 발견해야 했다. 빈틈을 찾아 업무화 시키고 해결하는 능동성이 길러졌다. 하지만 누가 시킨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을 해나가는데  스스로  인생에서의 당위를 부여하는,  일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한참 나중에 세간에서는 이것을 멋있는 말로 ' 크래프팅'이라고 부른다는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아주 미흡하지만 반강제적 반주체적  크래프팅을 진행하고 있었고, 결국엔  시간은 지금 나를  을 선택하게끔 인도했다.


지금은 그냥 10년 전의 나를, 5년 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괜찮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떻게든 너는 너의 길을 찾을 거라고. 그냥 안주하지만 말라고.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은데 계속 가게 된다면 그냥 틀어지는 대로 한번 가보라고.


이제 돌아서 다시 한 지점에 온 것 같으니, 나는 이제 다시 다음의 길을 돌아봐야겠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좁게, 그리고 깊게 돌면 되지 않을까.

아마 지금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팀 덕분에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또 용기를 내본다.


다음의 10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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