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컬처 Sep 15. 2023

이기적인 효도

2016. 7. 26.


2010년 6월, 태어나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았을 때 2할은 설렘, 8할은 미안함이었다. 


계절학기 6학점을 핑계 삼아 낯선 이국을 방문해보고 싶었던 이기심. 

그 욕심으로 나는 엄마에게 뻔뻔한 부탁을 했고 엄마는 '지금 살림이 곤란한데', 하면서 머지않아 돈을 부쳐주었다. 입금 문자가 울리기 그 며칠 사이, 그렇게 마련된 500만원에는 엄마와 아빠의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까.


비현실적인 쨍한 파란 하늘에 마주한 에펠탑, 고개를 돌리면 창 밖으로 마주할 수 있던 스위스의 만년설, 버스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던 평화로운 초록, 로맨틱함이 넘치던 프라하의 야경, 웅장함에 입을 담을 수 없던 밀라노 대성당, 해질녘 니스의 보랏빛 바다, 좋은 선후배들과의 맥주, 밤샘 이야기, 그리고 조금은 꼬질꼬질했지만 계절학기였기에 가능했던 글로벌 기업들의 방문까지. 


나는 그 돈을 빌미로 어디에서도 사지 못할 젊은 추억을 얻었다.


촌스럽게 시차 적응에 실패해 골골거린 것만 빼면 모든 건 정말 완벽했고, 나는 그때마다 엄마와 아빠를 떠올렸다. 특히 엄마.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주말 아침마다 꼭 여행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민트빛 거실장에 이국적인 장식품을 하나둘 모아두었던 엄마를.

있을 땐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없을 땐 우릴 위해 희생해야 했던 엄마를.

경이로운 풍경과 분위기에 감탄하고 마냥 취해있기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반지의 제왕 프로도 뺨 치는 타고난 의지박약자인 나는 서른이 끝나기 전에 엄마, 아빠가 유럽 땅을 밟게 하겠다며 아주 소박한 의지를 불태웠다. 별 같지 않은 월급에 야금야금, 그래봤자 거의 대부분은 최근에 마련한 것이지만. 6년이 걸렸다. 


올 여름에 유럽에 가시자고, 어디어디 가고 싶냐는 물음에 엄마는 한참을 프랑스, 스위스 만년설하면서 머뭇머뭇하다가 콜로세움도 보고 바티칸 안에 들어가 보고, 아빠는 내가 신혼여행을 갔던 포지타노를 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을 보고 거기 부산 달동네 아니냐고 했던 건 내가 부러웠던 농담이 분명했다. 

타깃은 이탈리아로 정해졌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처럼 설레했다. 

아주 오랜만의, 먼 거리의, 자영업자면 선뜻 나서기엔 부담스러운 바캉스철의 긴 여행. 


아빠는 생전 당신 의지로 고르지도 않았던 신발을 세 켤레나 탐을 내 우리의 웃음을 샀고, 밤마다 구글 번역 앱에 '와인 두 잔 주세요'를 입력해 보고, 사위와 딸들이 선물한 새 미러리스 카메라 설명서를 정독했다. 엄마는 퇴근길마다 아빠의 반바지를, 린넨 셔츠를 하나씩 사들였다. 이탈리아에 아웃도어가 웬 말이람. 아빠의 열흘 간 코디는 이미 한 달 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늘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이탈리아로 떠났다.


난 꼭두새벽부터 인천으로 달려가 김치찌개를 결제했다. 당연히, 마땅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도 준비를 오래 해서 별로 설레지도 않는다는데, 엄마의 파마머리는 단단히 말려있었고 앞서가는 아빠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너무 빨랐다. 무사히 귀국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더불어, 자식은 부모보다 끝까지 이기적이라고, 나는 평생 갚지도 못할 그 빚을 아주 조금이나마 갚은 것이라 자위한다.


모든 계획에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적극 협조해준 남편과 동생에게도 정말 감사하다. 


두 분의 인생에 영원히 남을 열흘이 되기를.


2016. 7. 26. 

매거진의 이전글 잠옷과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