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방영되자 우리 부부는 당황했다
설마... 설마?!... 티브이 꺼!
우리 부부가 같은 부서였을 무렵, 남쪽으로 사내 워크숍을 떠났던 적이 있다. “워크숍은 일의 연장이니까 모두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라는 부서장의 말을 듣고, 주말을 껴서 가야 하는 워크숍이 더욱 싫어졌던 기억이 있다.
“평소보다 더 냉랭하게 굴자. 눈도 마주치지 말자.”
퇴근 후 나름의 치밀한 작전을 짠 나와 아내는 다가오는 1박 2일 부서 워크숍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학수고대했다.
청량해 보이는 가을 하늘이 유난히 야속해 보이던 금요일 오후, 불타는 금요일 밤을 부서원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머리에 살짝 열이 오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선발대 먼저 출발합니다. 후발대는 업무 마무리하고 이사님도 모시고 같이 오세요.”라며 잽싸게 사라지는 부서원들을 보며, 당시 팀장과 그 팀의 유일한 팀원이었던 나는 일이 많아 선발대가 되지 못한 상황을 크게 한탄했다.
“내가 운전까지 해야 해? 이 나이에 이사님까지 모시고? 참나.” 팀장이 신경이 잔뜩 곤두선 채 내게 말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고속도로 화물 차선에서 시속 80킬로미터 이하로 정속 운전하는 것도 힘겨워했기 때문에 ‘운전은 네가 좀 해라’는 팀장의 압박을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팀장은 이사님을 뒷좌석에 태우고 조수석에는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앉힌 채 고난의 드라이빙을 했다. 시골이라 가로등도 없었다. 우주보다도 더 시커먼 어둠을 뚫고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별장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이미 잔뜩 취기가 오른 동료들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윽박지르는 동시에 빨리 술 한잔하자고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불판 앞으로 이끌었다. 아까 본 흰 연기는 익어가는 고기가 뿜어내는 박수 소리가 후발대인 나를 환영해주는 퍼포먼스였나 보다. 워크숍 오기 싫다고 생각한 건 순간의 착각이라며 위로하고, 나는 술에 취해 일렁이는 동료들 속에 한껏 끼어들어서 하나가 되었다.
오가는 술잔 사이에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가 애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이번 워크숍의 제1원칙을 지켜야 하기에, 나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상추쌈을 맛나게 만들어 팀장과 부서장 입으로 배송시키고 열심히 술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했다.
1차 위기는 다들 얼굴이 붉게 물들었을 무렵에 일어났다.
“너희 잘 어울리는데, 한 번 만나볼 생각 없어?”라며 나와 아내에게 중매에 나선 한 선배 직원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번 워크숍의 놀림감이 생겨 잘됐다는 듯이, 따분한 일 얘기를 벗어나 숨통 좀 틔워보려고 눈을 번쩍이는 동료들까지 대화에 동참했다. “아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직장도 탄탄하겠다. 사람 착하고, 응? 용기 좀 내 보지 그래.” 나와 아내에게 집중되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던 내가 안절부절못하던 사이, 아내는 갑자기 홱 일어나더니 시원한 가을밤 정취가 무색하도록 냉랭한 기운을 내뿜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때 화장실이 급했던 것일 뿐이었으나, 그 상황을 본 동료들은 명백한 ‘거절’의 표현으로 봤던 것 같다. 갑자기 달아오른 분위기는 이내 뜨거워지는 데 쓰인 시간보다 몇 배의 속도로 차가워졌다. “자. 이쯤에서 끝내고 숙소 들어가서 좀 쉬다가, 또 모입시다.” 부서장의 말을 끝으로 별장 고기 파티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는 몰랐다. 두 번째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숙소에서 편한 옷을 입고 티브이가 있는 넓은 거실에 모였다. 다행히 이사님은 일찍 들어가 주무신다고 했다고 해, 직원들의 표정이 좋았다. 딱히 티브이를 보는 동료들은 거의 없었지만 티브이는 일종의 ‘화이트 노이즈’였다. 대학 엠티를 온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조용한 공기는 모두에게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티브이가 켜진 거실 풍경은 이상했지만, 자연스러웠다.
둥글게 둥글게 / 둥글게 둥글게 /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수건 돌리기 게임을 연상시키는 대열로 자리 잡은 나와 아내 그리고 부서원들은 술 마시기 게임을 하며, 불만을 쏟아내며, 일반 회사 직원 워크숍 뒤풀이 장소에서 흔히 하는 그런 대화를 이어갔다. 티브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나와 아내는 눈앞의 과자에 손을 뻗으며 티 나지 않게 서로를 흘깃거렸다.
새벽 1시가 가까워지던 시각, 티브이에서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방영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아내를, 아내는 내 얼굴을 동시에 봤다. 3주 전 우리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청권에 당첨되어 KBS 공개홀에 다녀왔고, 오늘은 우리가 다녀간 그 날의 녹화분이 방영되는 날이었다. 워크숍이 신경 쓰여 오늘 이 방송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살짝 불안했지만 괜찮았다. 그 수없이 많은 방청객 가운데 우리 둘 모습이 한꺼번에 잡힐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안심해도 될 것 같다며 다시 눈앞의 과자에 손을 뻗던 그 찰나, 거짓말처럼 카메라는 나와 아내가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장면을 비췄다. 행복해하는 표정의 우리,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1초, 2초... 화면에 나온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숨을 멈추고 재빨리 주위를 돌아봤다. 그 장면을 본 동료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한 가지 내가 간과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와 아내는 방청석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음을. 카메라가 마음만 먹으면 수시로 비출 수 있는 그 자리였음을 말이다.
사내 연애의 핵심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비밀이 깨지면 우리에게도 큰 위기가 오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갑자기 나를 엄습했다. 아내도 불안해 보이는지 리모컨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었다. 팀장이 “화장실 어디지”라며 일어나던 그 순간, 카메라가 돌아가며 이번엔 나와 아내 그리고 옆 커플까지 4명을 동시에 화면에 담았다. 나는 다급하게 나도 모르게 외쳤다.
“티브이 꺼! 시끄러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동료들, 그리고 내 말과 동시에 티브이를 끈 아내. 순식간에 묘해진 숙소 분위기에 나는 창문을 확 열어재꼈다. “공기가 답답하네요. 하하하” 열기가 확 몰려왔다.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나와 아내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태연해지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술을 마셔서 그런지 부서장도, 화장실 가려던 팀장도, 다른 동료들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술의 취기가 비밀을 감춘 두 남녀 사이의 간격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위기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