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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상 Oct 01. 2022

시청각장애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소통이다

시청각장애인 그리고 소통

시청각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가장 큰 어려움은 소통이다.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무지개의 색, 그  색깔과 색깔 사이에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무수한 색이 있다.

장애인을 떠올리 때 시각장애인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 청각장애인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런 전맹, 전농의 장애인은 소수에 속한다.

시청각장애인에게도 시각과 청각에 따라 수많은 이름이 붙을 수 있겠지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잔존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사람(전맹농 또는 전맹전농), 잔존 청력은 남아 있으나 시력을 잃은 사람(전맹난청), 잔존 시력은 남아 있으나 청렦을 잃은 사람(저시력전농), 마지막으로 잔존 시력과 청력이 남아 있는 사람(저시력난청)이 있다.

내 경우는 전맹난청으로 시력은 불빛만 감지할 수 있고 청력은 소음이 있는 상황에서 거의 듣지 못한다.

청력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가봤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 문제라는 말만 들은 채 늘어난 건 병원비와 진찰 횟수가 전부였다.

청력에 이상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니, 내 의지로 줄였다.

내 친구 중에는 시력을 잃기 전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의 스토리를 통화로 얘기해주던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알고 보니까 XX가 흑막이었던 거야”

“누구라고? XO?”

“아니, XX”

“아, XX... 와, 장난 아니네”

처음은 낯선 이름을 착각하는 정도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늘어났다.

“XX가 흑막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또 반전이 있었어”

“음... 그래서?”

말소리 자체는 들리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의미가 와닿지 않았다.

집중해서 들으려 노력해도 흘려버리는 단어는 늘어만 갔다.

친구의 전화가 반갑기도 하면서 두려워졌다.

“여보세요?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어? 어, XX가 흑막이었다는 거잖아”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었다니까. 다시 얘기하자면...”

대화가 어긋나고 잘못 전달되는 횟수가 늘어났다.

친구에게도 청력의 상태를 설명했기에 화를 내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되묻는 과정 자체가 상대방에게도 지치는 일임을 알기에 듣지 못한 채로 그저 흘려보내기만 했다.

친구와의 통화는 친구의 취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마무리 됐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 자체가 단절된 건 아니었다.

단체 채팅방에서 소식을 듣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스마트폰에는 접근성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어 텍스트를 소리로 들을 수 있다.)

음성통화라는 소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음성통화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소통 방법을 찾은 것이다.

삐삐에서 폴더폰, 폴더폰에서 터치폰, 터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소통의 매개체도 늘어났다.

현재의 sns 환경이 시청각장애인에게 더욱 커다란 고립감을 줄지, 새로운 소통 창구가 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말하는 특성이 늘어나면서 텍스트로만 정보를 얻기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카톡으로 장애 유형이 다른 시청각장애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걸 보면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진을 텍스트처럼 말해주고 설명해주는 세상도 오지 않을까.

무엇보다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글을 쓰면서 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우연의 산물은 아니다.

현재의 환경에서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을 찾고, 접근성을 확인하고 테스트 해보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라서 전달하려는 의지와 연결해주는 매개체,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청각장애인에게 소통의 도구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가장 큰 어려움 역시 소통이다.

장애 정도가 다르기에, 삽ᆷ온 환경 자체가 다르기에 이유를 꼽자면 다양할 것이다.

시청각장애인에 한정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현대 사회 역시 가장 큰 어려움은 소통 같다.

내 말만 하고 싶은 의지와 자극적으로 왜곡하는 매개체 됻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의지가 아닌 고집.

소통은 정말이지 어렵다. 

의미와 해석이 덧붙여질수록 더욱 그런 것 같다.

시청각장애인과 소통하면서 같은 말을 하면서도 그 의미가 달라지고, 바로 잡으려 노력해보지만 또다른 오해가 일이 생기곤 한다.
완벽할 순 없지만 적어도 감사의 말, 사과의 말은 의미를 덧붙이는 일없이, 해석하는 일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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