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였던 그 친구
지금의 성격은 필사적으로 살아온 증거
‘지금 여러분의 성격은 세상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온 증거입니다’
대학시절 캐릭터연구 강의를 맡은 교수님이 했던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을 있어 보이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지만 꽤나 감명깊게 들었던 말임에는 틀림없다.
왜 그 말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주변에서 ‘착하다’라고 하는 내 성격 때문이다.
착하고 바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내 자신을 포장하고 죽여 온 것 같아 어느새인가 ‘착하다’라는 말이 싫어졌다.
어른들이 해주던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닌 무형의 족쇄로 다가왔다.
그 착한 성격이 살아남기 위한 증거라는 생각이 들자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상유지일 수 있으나 애써 변하기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흘려버린 것에 가까웠다.
교수님의 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을까.
때묻지 않은 어른을 동경하는 나에게 있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만 남는 시절.
‘현땅!’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순수했던 친구가 있었다.
별명도 애칭도 아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지만 그 친구의 말투는 특이했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어린 찰리가 치아 교정을 위해 철심같은 걸 끼고 다녔던 것처럼 그 친구도 입에 철심 비슷한 것을 끼고 다녔다.
정말로 치아 교정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발음을 조금이라도 좋게 하려는 노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어눌해 보이는 말과 귀에 끼우고 다녔던 무언가(보청기) 그리고... 욕이었다.
“병띤아 죽고 띱냐”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누운가 시비를 걸어오면 어김없이 그 친구의 눈매는 날카로워지고 이를 악 다문 채 주먹을 얼굴 위를 향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욕이 듣기 싫었다.
세보이는 척하면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는건지 그저 한심하기만 했다.
“죽고 띱다 병띤아 어쩔래?”
“따라하지 말라고!”
“따라하지 말라고!”
역시나 겁먹는 녀석은 없고 놀리는 재미만 늘어난다.
이럴 때 그 친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뛰쳐나가거나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 친구와 어디에서 놀았고 같은 반이었는지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 친구와 대화할 때 발음이 좋지 않아서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어눌한 발음은 사소한 문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친구가 장애인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보청기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청각장애가 있고 발음이 어눌하고 화를 잘 냈던 것으로 보면 또다른 장애를 갖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교수님의 말에서 그 친구를 떠올리는 건 살아남기 위해 강해보이려 노력했던 그 욕 때문이었다.
자기 방어기제라는 어려운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한심하게 보였던 그 행동들은 모두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던 건 아니었을까.
“아이 띠발 하지 말라니까!”
외모를 놀리고 말투를 따라하는 동급생 때문에 하고 싶지도 않은 욕을 씹어 삼키지 못하고 뱉어낸 건 아니었을까.
약점을 잡히지 못한 몸부림을 어린시절의 나는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건 아니까.
꼴사나운 건 맞서기 위해 주먹을 들었던 그 친구보다 사람 좋은 미소만 지으며 회피하기만 했던 나였을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그 친구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추억은 희미해지지만 목소리와 얼굴은 선명해지는 친구.
굳이 강한 척하지 않아도 어울려 놀 수 있는 진짜 친구를 만나 욕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