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하는 숨바꼭질
숨바꼭질이라는 놀이를 어린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해보지 않더라도 어떤 놀이인지는 들어봤을 것이다.
술래가 숫자를 세면 술래가 아닌 친구들이 일정 범위 안에 숨고 숫자를 다 세면 술래가 친구들을 찾는 놀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의 내가 술래가 되어 친구들을 찾아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숨바꼭질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1박 2일로 캐리비안베이와 에버랜드로 놀러 간 적이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자주 만나지 못할 거라며 계의왹한 여행이었다.
나는 이 말을 영화 시작 전 피난 안내도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이해하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다.
시력이 조금 남아 있었을 때라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물놀이를 즐기고 숙소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때였다.
카드게임도 TV도 지겨워질 즈음 했던 놀이가 바로 숨바꼭질이었다.
거실이 좁아서인지 아니면 나를 배려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술래가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면 몸을 숨는 건 같지만 술래가 찾을 때 눈을 감고 찾는 것과 한 사람을 터치하면 곧바로 술래가 바뀌는 점이 달랐다.
“거기 숨었다고 못 찾을 줄 알았냐!”
매트릭스에 밑에 숨기도 하고...
“에이, 거긴 거실이 아니지”
“잘 봐. 경계선이라니까”
거실과 방 사이에 몸을 숨거나 대놓고 거실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등 숨는 방법도 다양했다.
모두가 즐거웠던 게임이자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시어지는 추억 중 하나다.
또다른 숨바꼭질을 얘기하고자 한다.
시력을 거의 잃었을 때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아주던 친척 동생이 집에 놀러왔다.
스마트폰으로 노는 것도 지겨워졌는지 친척 동생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 나 잡아봐라!”
장난스레 어깨를 치고 방 안에 숨어버린 친척 동생.
갑작스러운 숨바꼭질이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어디 있을까. 여기 있을 것 같은데”
“히히히...”
숨 죽인 채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손을 뻗자 내 손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술래가 아닌 사람도 움직일 수 있는 규칙인 것 같다.
1:1로 하는 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친척 동생을 찾아다녔다.
무게 중심을 낮춰 이리저리 손을 뻗어보지만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오빠 눈 안 좋은 거 몰라?”
갑작스럽게 시작된 숨바꼭질은 갑작스러운 여동생의 등장으로 끝이 났다.
화가 난 듯한 여동생을 잘 달래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숨바꼭질을 다시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숨바꼭질은 끝이 나고 나는 더 이상 친척 동생과 숨바꼭질을 할 수 없었다.
여동생의 말처럼 친척 동생이 나의 장애를 이용해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친척 동생은 눈이 보이지 않는 나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친척 동생은 그저 나와 놀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 서툰 행동으로 나온 것일 뿐이다.
여동생이 만약 고등학교 친구들과 놀고 있는 나를 봤다면 친구들에게 화를 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뭘까.
친척 동생이 미성숙해서? 장애를 이용해 장난치는 것처럼 보여서?
명확한 결론까지는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여동생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두 숨바꼭질은 똑같은 즐거운 놀이였다.
당사자가 불쾌함을 느끼고 차별이라 생각하면 그건 장애인 차별이 맞다.
하지만 과도한 친절과 배려 또한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에서 장애인이 분리되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지나친 배려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말이 장애인을 대변하는 말은 아니며 정답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한 마디 덧붙이자면
장애인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대해주고 이해하면 된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친청 동생과 놀았던 숨바꼭질처럼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려 놀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