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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Aug 14. 2019

우리 사이에 놓인 관습법

   결혼을 해본 것도 아니고 아직은 청년의 나이이기도 하여 내가 반려자 혹은 연인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여성과 5년 이상을 교제하며 만나왔으니 적어도 연애에 관련한 것만은 몇 마디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여러 명을 만나보았냐고 묻는다면 곤란하겠지만.


   최근의 일입니다.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 퍼뜩 '이건 조금 위험할 수 있겠는 걸'하는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평소엔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내 안에 어떤 단편적인 규정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규범의 총체 같은 것이 있어 이미 뱉어져 흩어져버린 나의 말에 대해 경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내가 의식적으로 주의하여 쌓아 온 규칙들도 존재하긴 하는데, 이번의 것은 그야말로 숨어있다 불쑥 나타난 느낌이었습니다. 경고는 결국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나 작은 오해가 서로에게 생겼습니다. 다행히 원만하게 해결했지만.


   지난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순조로웠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상당히 오랜 기간 '끝끝내 우리는 각자라는 평행선을 굽혀 가까워질 수 없구나'라는 절망적 인식을 이겨내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체념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 했다 고백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어떤 종류의 진전도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상처들을 잠시나마 확인한 순간들도 있었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중 상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구별해낼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고, 나름의 작은 대처 방안 및 방어 기제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해와 아픔을 일률적으로 경감시켜주었나 하면,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그렇다면 연인이라는 것이 무어길레 이렇게 특수한 기쁨과 슬픔을 선사할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마 가족이란 것은 내가 가장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하여 내가 이미 그들과 동화되어버린 부분이 적지 않아 조금 다르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다시 말해 가족과 나 사이에 놓인 규범과 규칙들은 최초의 것이기도 하며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좋아하건 밉건, 나의 호흡, 걸음, 단어, 휴식, 식사, 관심사에서 놀랄 만큼 많이 가족의 흔적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처럼 '가족이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또 가족이기에 더없이 성가시다'라는 또 다른 특수성도 있습니다만.


   오늘 내가 그녀 관계에서 발견한 것은 비교적 안정적이면서도 여전히 끊임없이 새로운 조항이 추가되고 있는, 기록되지 않으며 보이지는 않는 관습법의 형상 내지는 흔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족 사이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끊임없이 이 사건으로부터 이러한 항목이 추가되고, 저 기억으로부터 저러한 항목이 개정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관계의 깊이라는 건 그 무형의 관습법을 쌓아오며 공유한 시간과 에너지의 총량과, 서로를 위해 그것에 자신을 양보할 수 있는 이해와 희생의 정도로 가늠될지 모릅니다. 물론 서로에게는 끝끝내 타협할 수 없는 자신의 생명 그 자체와 같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해와 이유를 넘어 보호해주어야 할 무엇일 것입니다. 연인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의 집합으로 그리니 뻣뻣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그 어느 관계들보다 더 견고히 쌓여 왔으며 애정과 영혼으로 소통한 그 틀 안에서 누구와보다도 함께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글로 끄적여보는데 그 사이 나는 실제적으로 더 나은 반려자가 되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다시 조금 부끄럽겠지만.


[ 이미지 출처 : Henri Matisse, <The Embr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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