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들과 바람 May 15. 2019

언제나 어둡고 경이로운 것

   우리에게는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커다란 마음의 영역이 있다고 하지요. 무의식이라고 하는, 내가 감각하지도 포착하지도 못하는 거대한 인간성의 한 덩어리가 안쪽에 침잠해있다는 것은 사실 듣고도 쉬이 이해하고 믿지 못할 말인 것 같습니다. 그것의 개념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아직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최근의 연구를 보면 상당히 많은 정보들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뇌에서 처리된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 그것이 오늘날의 의미에서 과학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 분석을 시도했던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떤 사람이 실수처럼 저지른 언행을 예사롭게 넘기지 않고 그것의 이유나 의미를 파헤치곤 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 말하거나 듣거나 잊은 이유는 우리의 무의식적 소망이 거기에 투영되거나 혹은 억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Freudian slip이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개념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그냥 멍해진 정신에, 자신의 내면과 전혀 상관없이 툭 튀어나온 대답일 수도 있잖아"라고, 마치 내가 어디서 실수를 하고 온 것마냥 다소 억울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모든 것들에 하나 하나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 사태를 과하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물론 엄밀히 나누자면 Freudian slip은 모든 말실수를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내 의도와 다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 그저 분석하려고만 하는 학자들에게만 닿으면 다행인데, 이따금씩 그것이 가까운 이에게 의도치 않게 전해져 상황을 완전히 꼬아낼 때도 있습니다. 친구 한 명은 술에 취한 채 애인과 전화를 하다 그만 그 애인의 이름을 전 여자친구의 이름과 바꿔 불렀다고 합니다. 물론 바로 그 친구는 헤어지게 됐습니다. 친구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전 연인을 항상 잊지 못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여하튼 자신이 의식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어떤 말이나 행동들이 영 좋지 않은 시점에 불쑥 나올까 걱정되게 만드는 일화입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이따금 내가 십 년 이상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건이나 인물이 꿈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혹은 깨어있을 땐 상상으로도 그려본 적 없는 이야기가 펼쳐져 깨어난 뒤 어떤 죄책감마저 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가 무의식에서 그렸던 것들이 이런 것들인가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나의 삶의 전반적인 풍경들이 송두리째 뒤집어질 것들이기에, 거기에 어떤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꿈들이었습니다. 아마 어쩌면 평생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것들도 그 중 있었을 것입니다. 꿈의 작동 방식에 대한 연구문헌을 읽고 나름 이해해보아도, 아직도 꿈 하면 어떤 신비스러운 그림자가 조금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하루키는 작가는 자신의 내면의 지하 어둠 속에서 작품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마음과 육체의 강인함을 유지해야 한다고도 하였는데, 그가 말한 지하의 어둠이란 이와 같은 무의식의 영역 비슷한 것이었을까요. 나는 그것들과의 우연한 조우에 깜짝 깜짝 놀라곤 하는 정도인데 그는 스스로 찾아가 대면할 수 있는가 봅니다. 그래도 그런 그에게도 그 어둠은 꽤나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것임은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이 스스로 의식적으로 컨트롤하기 힘든 마음의 영역이 있음이 꼭 나를 넘어뜨리고 어렵게 만드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가끔씩 나는 내가 쓴 문장 혹은 노래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의문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놀라게 하고 무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하나, 하는 그런 자찬(自讚)의 감각이 아니라 나로서도 내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워 당혹스러운 느낌이랄까요. 아마 모두가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법과 같은 신비한 과정이 어쩌면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혹은 의식적으로 감각하지 못하는 이 심연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인지심리학의 현저한 발전으로 사람의 마음, 꿈, 무의식에 대한 이전 시대의 많은 신비스런 생각과 추측들이 사라졌습니다만, 아직도 매우 두꺼운 안개로 가리어진 미지의 영역이 꽤 넓은 것 같습니다. 마치 우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안의 세계에 대해 대견히 여겨도 될 만큼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과학자들께 감사)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아직도 모르기도 합니다. 헤세는 프로이트의 저작을 읽고 그에 대해 "시인들은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시인들이 당신의 글에서 시를 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예술가가 경이로운 것에 대해 민감히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안의 세계는 언제나 그 경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 이미지 출처 : The Meadow by Barbara Bosworth & Margot Anne Kelly ]


[ 일상에서 활용하는 맥락에서 단어의 조어(造語) 형태만 보면 위의 글에 '무의식(unconcious mind)'보다는 '잠재의식(subconscious mind)' 혹은 '심층의식' 등의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여 그 단어들의 의미 간 차이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후자의 것들은 유사과학의 글에서 특히나 꽤나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학문적 견지에서 둘을 엄밀하게 구분한 것이 아니라 단어의 오염 정도를 주관적으로 판단해 구별한 뒤 사용하였다 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문학이나 에세이의 글들에서는 둘을 동일하게 활용되는 것 같습니다.

두 단어에 대한 설명으로 출처가 의심스러운 문헌들도 많아 그래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관련된 글 하나를 덧붙입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생명이 있어야 할 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