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만드는 공간을 마련하자
퇴직을 하고 정말 좋았다. 늦게 일어나도 되고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양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차도 한잔하고 해가 중천에 올라오면 가벼운 복장으로 동네 한 바퀴를 거닌다. 과수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참 일을 하고 새참을 먹을 시간이다. 아내도 그동안 고생했다며 함께 산책도 하고 점심도 같이 하고 카페에도 동행하며 여유를 즐기도록 도와주었다.
딱 일주일이었다. 아내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다 보니 싫은 내색까지는 아니어도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청소기를 켜고 거실 청소를 하기도 하고 빨래거리를 가득 들고 나와 세탁기도 돌리고 이래저래 부산한 아내를 보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창나이의 남자가 집에만 있자니 스스로 자격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퇴직을 하고 가장 힘든 것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직장으로 출근을 하여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제 아침이 되어도 갈 곳이 없고 하루 종일 방콕을 하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무엇이라도 할 요량으로 책상에 앉아보지만 집중력도 떨어지고 집이라는 환경이 진행이나 능률면에서 여건이 좋지 않았다. 결국 오래 하지 못하고 소파에 드러눕게 되곤 한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집을 나서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나이라 공간이 필요했다. 제주 생활에서 터득한 노하우로 카페를 찾아보았다. 일을 하기 편해야 하므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선택하였다. 1-2층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라 공간분리가 되어 이용에 부담이 없고,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여서 출퇴근하는 느낌도 있어 좋았다. 강의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강의 자료 준비도 하고, 안건 심의나 감사 내역을 검토하기도 한다. 수시로 글도 쓰고 소소한 SNS 활동도 하고 지인과 전화 통화도 하고 일정도 수립한다.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때와는 진도나 효율 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완벽하게 보이던 장소도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정이 많이 들어서인지 손님이 적으면 왠지 마음이 안 좋다. 일부 언론에서는 카페에 자리 잡고 진상을 부리는 카공들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처럼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아니고, 콘센트를 몇 개씩 꽂아 전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좌석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한번 가면 2-3시간은 있게 되고, 노트북을 위해 전원도 사용하게 되고, 간혹 일인석이 없으면 두석 이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시립도서관에도 다녀봤다. 최근 리모델링되어 카페 이상으로 공간이 예쁘고 기능적으로도 개선이 되어 이용이 편리해졌다. 도서관에 가면 카페처럼 진상으로 보일까 봐 위축되는 부담이 없다. 냉난방의 환경도 최상이고, 전원 사용도 편리하고, 입출입이 자유스럽다. 단점이라면 이용객이 많아 일찍 가지 않으면 좌석 잡기가 어렵고, 도서관의 특성상 노트북 사용이나 전화 통화가 어렵고, 사람과의 미팅도 어렵다. 그럼에도 도서관은 매우 다양한 세대의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다. 특히 연세가 많은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공부를 하기도 하고, 신문을 보기도 하고, 영상을 보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 분들도 나처럼 아지트를 찾아온 분들이라는 생각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다.
나의 집은 모악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시내 외곽에 있다. 산기슭 오솔길을 걷다 보면 움막이나 컨테이너를 종종 만난다. 대부분 퇴직을 하였을 정도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들이 밭일을 하며 세컨드하우스 개념으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이 분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퇴직을 하고 각자 자기만의 동굴을 가꾸며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 고민하다 사무실을 임차하기로 결정했다. 비용 지출의 위험은 있지만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기에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편으론 나의 가치를 높여 지출한 비용의 몇 배를 수익으로 올리면 되지 않겠냐는 호기도 있었다. 몇 곳을 다녀보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장소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가구도 고르고 전자제품도 구입하고 인터넷도 설치하고 약간의 인테리어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무실을 갖게 된 행복함은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
매일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서 퇴근을 한다. 커피도 내리고 업무도 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지인들과 소통을 하며 지낸다. 일을 보러 다니다가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좋다. 힘들거나 지칠 땐 공원을 걷기도 하고 천변을 걸으며 머리를 식히곤 한다. 나만의 아지트에서 매일 성장하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