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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아 Jul 20. 2021

내가 나랑 함께 있어줘야 할 때, 나는 운동복을 입는다

내가 온전히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운동에 슬슬 취미를 붙이고선 기분이 좋았다. 땀을 흘리고, 조금씩 좋아지는 가동범위와 몸의 상태가 좋았던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즐거움이 있었다.


어떤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취미 삼아 해왔던 달리기를 할 때도 늘 그 어떤 기분이 좋아서 달리러 나갔고, 수영을 할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요가를 할 때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도. 늘 마찬가지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좋았던 그 기분을 되찾고 싶어서 언젠가부터 운동복을 자연스럽게 입었다.


언젠가 땀에 흠뻑 젖도록 2시간 여의 빈야사 요가를 끝내고, 머리가 산발이 됐고 온몸이 뻐근했던 그날. 매트를 말아 넣으면서 그 기분을 표현할 방법을 알아냈다.


'내가 온전히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은
운동하는 시간뿐'이라는 것


하루 종일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심지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게 주된 업무인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서 나는 때로는 그 많은 대화 중에서도 대화에 결핍을 느끼곤 했다.


목적이 있는 대화들, 그리고 '대화가 일인 사람으로서 일을 하는 나'를 수행하는 순간들마다 때로는 각각 다른 역할을 해야 할 때. 수많은 대화를 하는 그 모든 대화의 '내'가, 때론 각각 다른 역할의 '나'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각각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그럴 때마다 무언가 갈증을 느꼈다.


업이기도 하고 못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 모든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그것이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만하고 싶은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일지 돌이켜보면 그 각각 다른 수많은 대화를 해내던 '나'는 사실 각각 나의 일부들이고, 그 일부들이 때로는 내가 아니라 나의 수많은 역할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많은 목적이 있는 대화들 사이에서 나는 온전히 나와 대화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을 할 때는 달랐다.
운동할 때의 나는 오로지 나로서, 나와만 함께 있게 된다.


수많은 대화 중에 필요한 대화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사실 나는 누구일까 하는 고민들.



생각해보면 내가 누구인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달려온 시간들이 있었다. 이런 목표를 가진 내가 나이겠거니, 이런 일을 하는 내가 나이겠거니, 이런 걸 좋아하는 내게 나이겠거니. 그냥 그런 모호한 추측들로 나를 만들고 그게 나인 줄 믿고 살아왔다.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내가 진짜 누군지 모호해질 때쯤 입은 운동복은 내게 그런 질문을 할 시간을 줬다.


운동을 하면서 핸드폰을 보지 않는 것도 사실 한몫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소셜 미디어를 가까이해야 하고 여러 콘텐츠를 속독하며 취할 것들을 실시간으로 골라내야 하는 일을 하며, 여러 동향을 살피면서 사실 나는 나를 살필 시간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강제로 보지 못 하고 운동하는 한두 시간 동안은 온전히 내 감각과, 그 감각을 통한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해 스스로 묻는 과정만 남는다.


여행 만능론처럼 운동 만능론 같은 게 있다. 운동을 하면 별게 다 나아질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줄곧 한다. 어느 정도는 맞다.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태일 때의 이야기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몸을 일으켜 운동을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운동하면 나아질 것이라 말하는 여러 증상들은 사실 대개 운동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생기는 증상들이다.


나는 운동을 하면 모든 것이 나아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운동을 하면, 할 수 있다면 나에게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그저 내가 온전히 나와 함께 있어줄 시간이 조금은 생긴다는 그런 느낌.



사실 빠른 속도로 살아가다 보면 나를 잃기가 너무 쉽다. 아니, 잃기도 전에 나를 아는 것, 나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는데 딱 어제, 승학님이 SNS에 올린 이 표현이 (원출처는 모르겠지만…) 딱 그 마음이라고 느껴 유레카를 외쳤다.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게 나인 줄 알고 살아갈 때가 있다. 내가 단단했다 한들, 나도 모르게 좋아 보이는 것들을 하다가 그게 나인 줄 착각하고 산다.


나는 운동을 하면서, 그저 나와 내가 있어주는 시간들이 생기면서, ‘좋아 보여서 하던’ 것들을 많이 알아차리게 됐다.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던 순간들을 더 알아차리게 됐다. 빠르게 성장하는 곳에서, 나 또한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 분투하면서, 정작 잃었던 나와 있어 줄 시간, 내가 숨 쉬는 속도, 내게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에 대한 고민들.


나는 그래서 나와 온전히 함께 있고 싶을 때 운동복을 입는다. 운동하는 모습을 과시하고 싶어서도, 멋져 보이고 싶어서도 아닌 그저 그 시간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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