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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히 Jun 20. 2021

무거운 나의 흑역사야

나의 넓은 흑역사가 미운 이유

이불 킥.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뻥 뻥 차게 되는 행위. 창피한 일을 겪었거나 억울한 일이 있었거나. 흔히 흑역사를 만들었을 때 하는 행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의 흑역사는 이불 킥으로 넘기기엔 서운할 정도로 크고 무겁다.


 흑역사 배틀을 시작하자면 난 기꺼이 1등을 노리겠다. 그만큼 나의 흑역사는 깊고 넓게 존재한다. 밤마다 그 어두운 시간이 떠오를 때면 이불을 차기는커녕 오히려 이불을 두 손에 꽉 쥐게 된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기억들은 날 꼼짝 못 하게 한다. 내 흑역사는 귀엽지만은 않으니까.


나의 흑역사는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첫날, 교실을 잘못 찾아가 놓고 우리 반이라며 우겼던 기억부터 시작된다. 그중 가장 귀여운 축에 속하는 이 일은 가끔 떠올라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느새 빨개진 귀와 뜨거워진 볼은 당장이라도 8살의 나를 찾아가 뜯어말리고 싶을 뿐이다.


운동회에서 코끼리 코를 돌고 뛰어가 밀가루 속 사탕을 무는 경기가 있었다. 왜 그렇게 그 게임이 해보고 싶었는지. 결국 한 발 깽깽이로 균형감각을 어필해 출전권을 따냈다. 참 아무것도 아닌 운동회인데, 그땐 국가대표가 된 기분이었다. 코끼리코 10바퀴를 다 돌았고 서있는 나를 중심으로 운동장이 뒤집어졌다. 금메달은 무슨. 그대로 고꾸라져 무릎을 모래에 갈아버렸다. 피가 너무 많이 나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싶었고 참 많이 창피했다.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며 넘어지던 그때, 운동장을 빙 둘러쌓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물가물하게 생각나는 그날의 그 장면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흘렀던 순간일 것이다. 땅을 손으로 짚기까지의 시간은 내가 앞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모두 마주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거의 매년, 크고 작은 흑역사를 차곡차곡 적립해왔다. 이자라도 쌓이는 건지 어쩜 매년 조금 더 창피한 흑역사가 생기는 걸까. 머리가 커져 조금 더 쪽팔림을 잘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더 어릴 땐 마냥 창피했고 자라면서 점점 후회의 비중이 커졌다.

 “아, 그러지 말걸”

 이제는 창피함과 후회가 적절히 어우러져 완벽한 흑역사를 완성시킨다.


내 흑역사 속에는 수많은 내가 있다. 나인 게 싫을 정도로 ‘별로였던 나’와 안타까울 정도로 ‘바보 같았던 나’가 함께 있다. 촌스러운 머리를 예쁘다고 생각했던 멋없는 13살의 내가 있고, 친구랑 싸우며 한 마디도 못하고 듣기만 했던 19살의 내가 있었다. 아,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잠들어 갇힌 끝에 경찰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에 간 나도 있다. 또 가스 라이팅을 취미로 하는 친구에게 하지 말라는 말도 못 한 채 그대로 도망쳐버린 20살의 나도 있었고, 대학교 엠티에서 자진해서 친구들과 트와이스 춤을 췄던 나도 있었다. 온갖 후회가 조금씩 묻어있는 나의 넓은 흑역사가 참 밉다.


나 진짜 왜 그랬냐.


별 기억을 다 끄집어내 보며 느낀 건, 별일이 다 있었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시간은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생각만 하면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기억이 있다. 흑역사라고 하기에도 싫은, 잊지 못해 속상한 기억들이 나를 괴롭힌다. 반면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름 귀엽다고 생각되는 기억도 있다. 그 기억들은 이제 내 흑역사 폴더에서 내보내 주려 한다. 오늘 보니 바탕화면에 꺼내 두어도 그다지 민망하지 않은 기억도 꽤 있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뭐.. 다들 그렇지(?)


이 글을 쓰며, 오늘 나의 지난 흑역사를 다 꺼내보겠다는 각오로 기억을 되새겼다. 평소처럼 나도 모르게, 고요한 기억의 바다에서 갑자기 튀어 오르는 흑역사를 마주하던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그물로 깊은 곳의 모든 흑역사를 다 끌어올렸다. 이불 킥을 각오했고, 지붕킥까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끌어올려보니 절반은 흑역사 축에도 못 끼는 작은 기억이더라.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내 예상보다 거대한 흑역사였다. 그 역사는 모두 진정한 후회와 멍청했던 내가 만든 시간이다.


‘어머, 과거의 나 귀여워! 미숙했던 나 너무 귀여워!’ 하고 바보 같았던 나를 그냥 넘기면 좋으련만. 타고난 성격이 그러질 못한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은 타고 타고 들어가 더 깊은 곳의 기억과 생생한 느낌을 마주한다. 이런 사람이라 유독 더 흑역사에 민감하고 예민한가 보다. 내 흑역사는 내가 만들었다. 그 행동도 내가, 흑역사라고 규정하는 것도 다 내가 했다. 결국 가끔 나를 괴롭히는 기억을 없애는 것도 내 몫인 거겠지. 이렇게 말로는 쉬운걸 왜 못하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또 가득 찬다. 아마 이 생각도, 이 글도 몇 년 후 나에게는 ‘바보 같았지...’ 하며 되새길 흑역사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밤, 아니 어쩌면 낮에도 불쑥 찾아오는 결코 작지 않은 내 후회의 기억들은 이불 킥으로는 물러가지 않는다. 무거운 나의 흑역사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너를 오래 안고 가야겠다.





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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