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은 지능 순이라더니 맞았어
회사를 그만둔 지 네 달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시간은 너무나 빠르고, 지루했던 9월과 10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11월은 보란 듯이 빠르게 사라졌고 이제 더 빠를 것만 같은 12월이 시작되었다.
8월 중순, 퇴사 날까지 정시 퇴근을 시키려던 회사를 끝내 그만두었다. 몇 번을 말하고 부탁해서 30분 일찍 나올 수 있었고, 끝까지 나한테 왜 그럴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를 관두며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속상한 것만 많은 6개월이 될 것 같았고, 나름 배움의 6개월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촬영과 매일같이 무거운 짐을 나르며 보낸 6개월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 그때도 사실 얼마나 별로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안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음..
먼저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의미 없는 나쁜 소리를 쏟아내는 사람에게는 흘려듣기를 사용하고 그들의 말에 하나하나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생각보다 창피함을 모르고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는 것. 그리고 나이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물론 너무 사랑을 듬뿍 담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더 실감했다. 사람은 다양하고 모두 다르다. 다른 게 당연하니까. 안 맞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내가 2019년도에 인턴을 하며 배운 것은 ‘남의 탓을 하지 말자’였다. 책임감 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의 탓을 할 시간에 극복할 방법을 찾고 함께 더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훈이었고 모두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신입사원이 되어 들어간 회의에서 이사님은 우리에게 ‘남 탓하세요. 내 잘못 티 안 내고 넘기는 게 일 잘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사실 그 말이 솔깃한 말이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반항심을 불러오는 말이기도 했다. 남 탓을 해서 내 잘못이 티가 안 나면, 진짜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정말 아무도 모르게 남에게 잘못을 미루는 게 가능할까? 우리의 리더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슬슬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회의에 참여한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며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는 대답을 했을 때, 그 잘못을 뒤집어쓸 ‘남’이 신입사원인 내가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다니며 실제로 내가 되기도 했다.
또 한 번 아주 굳게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던 적이 있다. 우리의 대행사와 카톡을 통해 피드백을 주고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들의 업무는 우리의 피드백을 반영해 제작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을’이고 나는 아주 드물게 ‘갑’이었던 순간이랄까. 매일같이 이어지는 카톡에 어느새 인사도 없이 아침부터 딱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는 카톡방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의 상사는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카톡방에서 있잖아..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해?”
거의 복사 붙여넣기 수준으로 상사의 말을 따라하던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메세지 복붙한건데 나한테 왜 그러세요’ 속으로 여러 물음표를 숨기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긴 얘기를 이어갔고 결론은 말할 때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를 붙이라는 것이었다. ‘을’이어도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까 예의를 지키라고. 그 ‘을’은 내 상사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그 카톡방에서는 6명 중 누구도 매번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했어야지, 실수했구나 싶었지만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들을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을’ 님과 친해져 둘이 만나 단톡에서 인사도 없이 일 얘기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니 그는 오히려 흐름 끊지 않아서 좋다, 매일 카톡 하면서 무슨 인사를 하냐며 괜찮다고 했다. 그의 괜찮다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보다는 그 당시엔 내가 무례를 범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인사도 하고 살갑게 말을 꺼내라는 내용을 ‘싸가지 없게 굴지 마’라고 말한 그 사람이 참 궁금하다. 진짜 유교 걸 중의 유교 걸로서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사람들을 알게 되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평가를 받게 된다. 가만있어도 나의 좋은 모습만 바라봐 주는 사람들을 근래에 너무 많이 만나서인지, 나의 부족한 모습만 캐내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바로 지쳐버린다. 결국 나는 여러 뜻을 가진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를 하고 나니 앞으로 무언가를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생겼다. 또 사람이 안 맞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또 일이 힘들어서 지치면? 그땐 내가 안 아플까? 건강상의 이유가 또 생기지는 않을까.
수많은 걱정을 품에 안고 3개월을 보냈다. 난 아프니까 당분간 쉴 거야! 당당하게 외쳤고 그 누구도 빨리 다시 일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3개월의 세미 백수 기간 동안 너무너무 지루하고 불안하고 힘들었다. 적성에 제일 안 맞는 건 공부가 아니라 취준이었나 보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운이라는 아빠 말처럼, 결국 적당한 타이밍에 딱 나 같은 사람을 찾던 회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교육 시장은 생각지도 않던 내가 21살에 우연히 하게된 교육 업계 프리랜서 PD 경험 덕분에 서류를 붙게 되었고, 힘들었던 전 회사의 경험 덕에 PD 직무를 유지하게 되었다. 진짜 인생은 타이밍인건지도 모르겠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날에는 너무 떨려서 비즈 반지를 10개나 만들었다.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야 잡생각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보았는데 엄청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 그래도 이번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을 거라는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입사 한 달 하고 삼일 차가 되었다. 배우고 싶은 점이 가득한 시니어들이 있고, 친절하고 귀여운 주니어들이 나와 함께 한다. 아직 회사와의 콩깍지 기간이라 모든 게 좋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강남 한복판에 차로 꽉 찬 도로를 보며 쉴 수 있는 라운지와 오로지 구매자의 취향만을 반영한 스낵바도 여전히 참 좋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보다는 보완점을 통해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혼냄이 없는 분위기를 가진 회사라는 점이 가장 좋다. 메일을 잘못 보내면 ‘진짜 이렇게 살 거야?’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그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 말을 들을 만큼 잘못한 게 아니라 혼내는 방식이 잘 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윽박지르지 않고도 반성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과 일 할 때 남는 것은 상처뿐이었나 보다.
그 전 회사 이야기를 하면 친구도, 가족도, 애인도 모두 나를 위로하기 바빴다.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말해준 것도 주위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회사 이야기를 하는 나를 걱정해주기보다는 응원해주고 좋아 보인다고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많이 행복한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33일 차지만 아직 야근은 두 번 뿐이다. 전 회사는 첫날부터 야근을 했었다. 업무도 아닌 텃세로 인한 야근이었다. 물론 그 뒤론 쭉 업무로 인한 야근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연봉 차이는 말할 것도 없으니 그 전 회사를 다니며 멋진 직장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25.1살의 내가 안타깝다. 25.8살 정도 된 지금은 아직 마냥 내가 대견하다. 앞으로도 대견할 일만 많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더는 내가 내 선택의 실패로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