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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Apr 03. 2023

덕유산이 나를 부르다 말았다

산이 나를 부른다

덕유산 등산은 약 두 달 전부터 계획된 것이다. 모악산 정상 정복에 실패한 세 명의 인간이 하산 후 콩나물국밥을 때려 넣으며 했던 얘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등산하자! 모악산을 오를 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면 나머지 둘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뱃속은 콩나물국밥으로 뜨듯하게 데워져 있었고 힘든 건 아까였고 지금은 괜찮으니 자기들도 모르게 낄낄거리며 좋다고 대답하고 만 것이다. 누가 제안을 했고 누가 대답을 했는가.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다만 셋 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니체의 말에 또 다른 근거가 되어 주었을 뿐.


우리가 등산 얘기를 하는 단톡방 이름은 산이 나를 부른다, 상징 이모티콘은 산과 산을 타는 인간. 그러나 언젠가부터 단톡방의 주 얘기는 등산이 아닌 캠핑으로 은근슬쩍 바뀌어져 있었다. 우리 어느 루트로 올라갈 거니. 우리 입산, 하산은 언제 할 거니. 이런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고, 꺼냈다 한들 금방 묻혀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그건 그날 생각하자. 그래, 그래. 이렇게 흘러갔다던가. 여하튼 대화의 주 내용은 우리는 그날 무엇을 먹을 것인가였다. 그날 뭘 할 것인가에 대해 떠들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음식 다음으로 중요한 건 등산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전날 친구네 집 캠핑카에 모여 먹고, 놀고, 자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덕유산에 올라간다였다. 덕유산에는 곤돌라가 있는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향적봉을 찍고 하산을 하냐 아니면 내려올 때 곤돌라를 타느냐. 누군가는 그냥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면 안 되냐고 말했지만 그건 나만 들어서 빠르게 묻혔다. 우리는 캠핑에 대한 기대 9와 등산에 대한 기대 1을 안고 3월 초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백수인 사람도, 백수 같은 직장인인 사람도, 자영업자도, 진짜 직장인도 모두 캠핑(등산) 날짜에 맞춰 일정을 조절했다. 그러나 3월 초 계획은 빠그라지고 말았다. 주로 뭘 먹을 거냐의 적극적 답변러였던 친구가 코로나에 걸려버린 것이다. 나는 안도했다.


한라산 정복으로 화려하게 등산계에 데뷔했으나 다음 등산은 폭망이었던 나는 다시 산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모악산에서 느꼈던 그 허벅지의 떨림과 사람이 숨이 이렇게 차면 죽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빴던 호흡, 다리를 움직여, 숨을 쉬어!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하나하나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말이야! 첫 등산을 한라산으로 시작한 사람이야!라고 큰소리치기엔 모악산에서의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했다. 이 체력으로 덕유산이라니. 세 번째 등산마저 폭망이라면 난 더 이상 한라산의 한자도 꺼낼 자격도 없는 거다. 10시간 내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들어낸 타이틀을 이런 식으로 내팽개칠 순 없지 않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한 달 뒤인 4월 초에 만나기로 약속했고 단톡방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약속 전날, 당일에도 단톡방엔 음식 얘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등산 계획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냥 모여서 먹고, 싸고, 자는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산화 얘기를 꺼냈고 코스 얘기, 곤돌라 얘기가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더 이상 등산은 없는데.. 덕유산은 내 눈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졌는데.. 등산화를 가방에 넣으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그날 꿈에 안개를 헤치며 어딘가로 향하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덕유산이 저 멀리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친구 집이 있는 무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덕유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땅으로 내달려온 나는 주변 풍경보다 장보기 팀이 사 온 음식량에 놀라고야 말았다. 그들은 그들 기준 1박, 그러니까 약 2식의 음식을 사 온 거라고 했으나 내 눈엔 15일 치 식량이었다. 그 박스 하나만 있다면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15일, 아니 30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큰 걸 샀니, 이걸 왜 두 개나 샀니, 다른 질문을 던져도 그의 대답은 온리 원. 난 작은 건 안 사.


친구 아버지가 화덕에 구워 주신 새우를 시작으로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 고기, 과자, 술, 소시지, 버섯, 딸기.. 이 모든 음식들이 가오나시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개구리들처럼 친구들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중간에 배부르다는 말을 몇 번 들은 거 같은데 왜 계속 먹고 있는가. 그럼 배가 부른 것인가 안 부른 것인가. 배가 부르다는 말은 진짜 배가 부르다는 게 아니라 아직 배에 자리가 있어서 더 배를 불릴 수 있다는 뜻인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대신 친구들을 따라 열심히 음식을 집어넣었다. 얘들아, 나 잘 먹지, 칭찬을 갈구하며.


친구 부모님 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캠핑을 위해 불 앞에 모여 앉았다. 장보기 팀이 음식을 담아 온 박스는 여고괴담 귀신처럼 돌아보면 내 옆에 있고 또 돌아보면 내 등 뒤에 있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태어나 처음 본 거대한 크기의 포테이토칩을 집어 들었다. 친구들은 병아리들처럼 누군가 먹을 걸 들고 있으면 그쪽으로 쪼르르 모였다. 누군가는 술을 누군가는 탄산음료를 잔에 담아 짠을 하고, 이제 불멍이 시작되나 싶었지만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결정이 남아있었다. 등산, 덕유산, 향적봉.


사실 곤돌라를 타든 기어 올라가든 시간만 정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에겐 의외의 복병이 존재했다. 이름하여 오달래, 4kg 흰색 복슬강아지. 나와 함께 온 반려견 달래였다. 곤돌라에 달래가 탈 수 있나를 시작으로 우리는 이것저것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국립공원엔 강아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걸 들은 친구가 덕유산 국립공원이야악! 외쳤고, 옆에 있던 친구는 계획이 파투 난 것에 대한 괴로움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또 안도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올 때 갈 때 모두 곤돌라를 타자고 했던 친구도 안심한 듯 보였다. 나는 달래 너 때문에! 하고 오버스럽게 소리쳤고 친구들은 왜 달래한테 그래, 달래는 죄가 없다며 내가 원했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돌아가는군.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느끼는 이 안도감.


결론적으로 우리는 덕유산 등산을 포기했다. 근교에서 산책을 하고 애견 동반 카페에 가서 커피나 마시고 헤어지자! 그 말에 우리 중 몇은 나처럼 안심했을 것이고 몇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걸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덕유산에 올라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덕유산은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이라는 뜻이다.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경계에 있고 최고봉은 앞서 말했던 향적봉이다. 향적봉은 약 1,614m이다. 친구들은 1,614의 의미를 알까. 한라산이 1,950m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그 산, 한라산보다 약 340m밖에 낮지 않은 산이라는 거다, 우리가 오르려고 했던 그 덕유산 말이다! 어마무시한 높이를 가졌으면서 덕이 많고 너그럽다니. 오르기 전엔 너그러워도 들어가면 난폭해질 것이다. 분명해.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니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고.


이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모르고 오르는 게 나을 뻔했나. 내가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지도 모르고 올랐던 것처럼. 덕유산을 정복하고 나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또 기세등등하여, 내가 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이랑,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도 올라갔다 온 사람이야! 거들먹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번엔 덕유산이 나를 부르다 말았지만, 아니, 불렀는데 내가 못 들은 척한 걸 수도 있지만 그 산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부름에 응답할 것이다. 내가 마! 를 외치기 위하여, 아주아주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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