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향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의 기쁨
내겐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 회사 재직 시절 이야기가 있다. 힘들었던 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내 결정권자인 팀장님 때문이었다. 나를 "자기야"라고 부르던 팀장님은 굉장히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시던 분이었다. 특히 그건 마케팅 디자인 컨펌할 때 빛이 났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이거 아이콘이 좀 그렇지 않아? 이 걸로 바꾸면 훨씬 나을 거 같은데?"
"여기 배경은 이걸로 하고 폰트는 이걸로 하고 여기는 이렇게 하고 여기는 이렇게 하고..."
디자인 마이크로 매니징의 가장 주된 이유는 팀장님이 디자이너 출신의 마케팅 팀장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디자이너였던 것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으셨고, 자기의 감각 또한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분이었다. 디자인이 변경된 뒤엔 "거봐 내 말대로 하니까 훨씬 낫지?" 하는 말을 항상 붙이곤 하셨으니까 말이다. (여담이지만 그런 피드백을 받는 사내 디자이너들이 하청업체한테도 이렇게까진 안 하겠다고. 지시가 너무 심한 것 같다며 엄청난 컴플레인을 하곤 했다. 팀장님과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난 항상 조율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만 했다...)
난 디자인 컨펌 과정이 원래 그렇게 까다롭게 진행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 팀장님 밑에서 일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디자인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디자인을 보는 시야도 조금 넓어졌지만, 그 당시에는 업무의 9시간 중 약 70% 이상을 카피를 쓰거나 하는 일보다 디자인에 쓰일 이미지 찾기, 디자인 레퍼런스 찾기 등에 몰두했다.
그런데 컨펌할 때는 굉장히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시지만, 이상하게 업무 오더를 내리실 땐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말하기도 하셨는데.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들었던 그 말. "좀 더 세련된 느낌으로"
사람마다 모두 느낌이 다른 것 아닌가... 나는 팀장님의 컨펌 때마다 나오는 그 느낌을 찾기 위해 매일 골머리를 앓았다. 한두 번 그 느낌을 제대로 맞출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2-3번을 거쳐야 어느 정도 그 느낌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마다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하시려나... 하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그 회사에서 일할 땐, 내가 있지만 내가 없어야 했다. 무조건 팀장님의 입맛에 맞추어야 컨펌이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마케팅 업무니만큼 의욕도 있던 나는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방향을 고집부려 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번번이 컨펌 단계에서 무수히 많은 '느낌 피드백'을 들었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의욕도 열정도 사그라져갔다. 아니 오히려 꺼트려야 했다. 내가 일에 대해 의욕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건 내가 더 힘들어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팀장님 기준에 맞춰야 내 업무가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신입 시절부터 내 의욕과 열정을 비워내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다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팀장님의 말도 있었는데. 그 느낌을 잘 못 찾는 나를 보면서 팀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그냥 디자인을 볼 때 내가 되었다고 생각해. OOO였다면(팀장님이 자기 본인 이름을 호명했다.) 어떻게 생각했을까? OOO였다면 뭐라고 할까? 그냥 자기가 나라고 생각해"
???????????. 그랬다. 팀장님이 나를 성장시켜 주려고 하시는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나의 성장이 아닌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난 팀장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의욕 많았던 그 시절에 무수히 나를 지워가야만 했던 그 아픈 시절에. 나는 깨지더라도 내 방향대로 일을 진행시켜보고 결과를 얻어보고 싶었다. 물론 팀장님 눈에 내가 아직 그럴 실력이 아니고, 그렇게 맡길 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아를 가지고 일하고 싶었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두 번이라도 그렇게 성장하고 싶었다. 팀장님의 복제품으로 성장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이때의 팀장님은 본인이 마이크로 오더를 내린 뒤, 나름 책임은 지시는 분이었다. 다다음 회사에서 만난 오더는 본인이 내리고, 책임은 나에게로 돌리시던 그 상사분은 내게 또 다른 좌절과 트라우마를 주었다.)
무튼 그래서 내게 회사는 힘든 곳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던 방향을 걸고 일하고 싶었으니까. 주도성을 가지고 일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나는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너무 이상하고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냥 적당히 하자. 대충 좀 하자'며 어깨를 치고 가는 동료들도 있었다. 결국 나는 나를 버리고 팀장님의 뜻대로 해야. 동료들에게 미움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정도로 일을 해야 그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회사에 녹아들지 못했고, 튕겨져 나왔다.
그렇게 조직생활에 번번이 실패하던 나는 두려웠다. 이제 내 밥벌이 못하는 거 아닌가 하고. 그러다 프리랜서로 업무를 시작하며 드디어 맞는 옷을 찾았구나 싶었다.
프리랜서로서의 일은 업무가 들어오면 일의 결정권자가 나다. 어떻게 표현할지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으니 때론 혼자 끙끙 앓을 때도 있다. 하지만 팀장님과 상의 후, "왜 내가 말한 대로 안 했어?"라는 피드백을 듣는 것보다. 혼자 고민하고 뒤척이다 결과물을 내었을 때 훨씬 더 큰 만족감이 있었다.
물론 수정 요청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 요청을 내 식대로 곱씹어 다시 전달한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에 대해 담당자분이 좋은 피드백을 해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내가 나의 결정권자가 되는 일은 짜릿하다. 매번 새롭다. 일 하는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