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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23. 2024

장작도 아닌데 너무 불태우지 맙시다

왜 나는 쉽게 번아웃을 겪을까

지난주, 아는 언니와 만나 저녁을 먹었다. 나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 정도 학원에 다녔는데, 언니는 같은 기수 동기였다. 이상하게 자리도 멀고 겹치는 일이 없어 이름하고 얼굴만 아는 사이로 지내다가, 방학 전날 정수기 앞에서 트인 첫 대화가 너무 잘 통해 그 자리에서 20분 넘게 서서 입이 마를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서로 참 잘 맞는단 걸 알았지만 우리는 그 후로도 여전히 원래 조원들과 앉아 별다른 대화 없이 인사만 나누며,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언니가 먼저 취업하고 학원을 조기 수료하면서 단둘이 처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아쉬운 안녕을 나눴다.     


두 번째 만남은 내 취업을 축하하는 술자리였는데(음식은 잔뜩, 술은 딱 한 잔씩 시켜 방치한 채 떠들기 바빴고 우리는 한 자리에서 무려 5시간 동안 대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세 번째 만남은 내 퇴사 소식을 전하는 자리가 됐다. 새 직장에서 저녁도 주말도 없이 바빴던 탓이다. 반가운 인사를 얼른 나눈 후, 밥을 먹으며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지난 직장에서의 상황과 퇴사를 결심한 계기를 털어놨다. 내가 너무 열심히 해버렸다고. 내가 나를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스스로에게 참 미안했다고. 언니도 나도 말 많고 정 많은 공감쟁이들이라, 이미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일인데도 언니의 위로가 참 고마웠다.     


그러고는 말수 적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가짓수의 대화 주제가 오갔다. 아마 누군가 우리가 나눈 대화를 도식화한다면 거미줄과 비슷한 형태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진로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일상 속 즐거움과 새로운 배움, 연애 얘기까지. 날씨는 9월 말, 단군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환상적인 가을 날씨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귀한 날씨를 누리기 위해 테라스에 앉아 ‘최신 연애 근황 보고 - 특정 성격유형(MBTI)의 사람들은 왜 그런가’하는 이른바 MZ세대 토크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걔가 마음만 있다면 언제 까지든 맞춰가고 싶었어. 사람을 어떻게 단 몇 달 만에 알겠어.”

“나도 그래! 최선을 다해야만 미련이 남지 않잖아.”

“그러니까! 근데 걔는 자기는 그게 부담스럽대. 자긴 사귀는 사이에도 적정 거리가 필요하대.”     


그야말로 환상의 짝꿍이 아닌가? 나도 언니도, 연애도 대충 하지 않는 모범생들이었던 거다.     


“그런데 말이야, 일도 연애랑 비슷한 것 같아.”

“어떤 면에서?”

“일에도 적정 거리 유지가 중요하잖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너무 불태우다간, 결과가 좋지 않은 거.”    

 

그랬다. 열심과 노력이 다가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빼면 시체에 가까운 나는 흠칫했다. 물론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던 때가 떠올랐다. 첫 회사인 데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 업계에 입문한, 너무나 동경하는 스승 아래에서 일하게 된 나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았다. 회사를 너무 사랑했고, 간절히 인정받고 싶었다. 야근이 당연해지자 몸이 지쳤다. 노력만큼 인정받지 못한단 생각에 마음이 지쳤다. 그렇게 나는 헤어짐을 고하는 연인처럼 이별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회사는 그런 나를 위로해 주고 응원해 줬다.     


헤어지자 하니 잘해주는 옛 연인을 보는 듯, 아쉬움이 밀려왔다. 진작 좀 더 믿어볼걸, 믿고 털어놔 볼 걸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끝이라서 줄 수 있는 위로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스스로 최선을 다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후회가 올라오기 전에 꾹 눌렀다. 좋은 만남만큼 좋은 이별도 중요하다고 하는데, 내 서툴렀던 첫 이별을 조금이나마 덜 부끄럽게 만들어준 것은 이유 없이 참 좋아했던 어느 어른이셨다.     


그는 같은 부서는 아니고 종종 협업하며 나를 도와주는 직무에 계셨는데, 이상하게 처음부터 그냥 좋았다. 중년의 여자분이셨는데, 일 때문에 그분 자리에 갈 때면 괜히 뭐라도 간식거리를 들고 가 시시콜콜한 수다(사실상 재롱잔치)를 떨며 마음을 충전하곤 했다. 그분도 그 마음을 아셨는지, 가는 길이라며 종종 차를 태워주시기도 했다.     


퇴사가 임박했을 즘의 나는 불신의 화신이 되어, 그분을 어디까지 신뢰해도 될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은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이런 상황이라 마음이 너무 지쳤고, 몸까지 아파지기 시작해 퇴사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진심으로 들어주셨고, 어른으로서 조언해 주셨다. 좋은 이별을 위한 영양가 100%의 충고를 전해 받았다. 이런 건 정말이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오로지 꾸준히 쌓은 덕(재롱)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 많고 정 많은 나, 잘했어!)     


그러나 잘 마무리한 것과 별개로, 경험에서 배움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지 않겠는가. 퇴사 후, 나는 자유와 함께 돌아온 냉철한 이성을 빌어 첫 회사에서 보낸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스스로를 잘 돌보았나요? 아니요. 태도에 기복이 있었나요? 네. 상대방을 고려하는 요령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야말로 적정 거리 없는 직진의 연속이었다. 내가 달랐더라면 상대도 달랐겠구나. 우리에게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했구나.     


방송인이자 사업가인 홍진경 님이 이런 말을 했다.     


“겸손을 남에게 굽실대는 태도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는 겸손이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본다. 나는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거리 유지가 안 되는 사람들, 너무 잘하려다 ‘번아웃’이 오고, 상대에게(그것이 직장이라 하더라도) 섭섭함을 느끼고 마는 '열심 중독자'들은 어쩌면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겠다. 노력이 곧 성공이 된다는 공식은 틀렸다. 성공을 부르는 요소는 너무나 복잡다단해서, 무엇 때문에 탈락할지 모르니 통제 가능한 노력이나마 한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접근일 것이다. 누구나 하는 실패, 왜 나는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성공의 징검다리를 건넜던 영광의 시절에 갇혀, 비대한 자의식을 완벽주의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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