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이 길을 떠나면 그중에 스승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논어의 '삼인행'구절이었다.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교훈 삼아 올바른 행동을 하면 된다.'라는....
얼마 전 주말.
남편과 방문했던 '선샤인 스튜디오'를 다시 찾았다. 주말에 TVN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구미오뎐 1938'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는 보도도 있었고 조카들과 선샤인 스튜디오를 찾은 줄 알고 남편과 둘이 방문한 게 미안해 일찍 집을 나섰다. 언니네 집 마당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다섯 살 먹은 손자 녀석이 창가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가운 맘에 아는 척을 하자 창가에서 휙 사라졌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녀석이라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조금은 섭섭한 맘을 누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애들 왔나 봐."
언니가 거실로 나오며 "왔어? 할머니 보고 싶다고 따라 나서 형부가 데리고 왔어."라고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쓸 자기 소지품을 당차게 에코백에 챙겨 넣고.
"그럼 어쩌지? 오늘 꽤 더운데 뙤약볕에 걸어도 괜찮을까?"
"괜찮아. 잘 걸어 다녀."
우리 차에 할머니를 따라 순하게 오르는 녀석이 너무 예뻐서 친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재할머니 곁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집을 나와 얼마쯤 도로를 달리자 덥다며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 바람에 머리를 밀고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웃음이 나왔다.
"건후야!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시원해질 거야."
녀석은 '더워. 할머니 더워."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햇볕은 따가워지고 절정에 이르는 시간이 되었다.
선샤인 스튜디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영업 중이라는 '금성(?) 다방'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제법 안은 시원했다. 녀석은 예쁘게 물들인 솜사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할머니한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녀석에게 솜사탕이 든 컵을 안겼다. 어른들은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미숫가루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혼자인대도 나름 즐겁게 지내는 녀석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날이 너무 더워 걱정이 되었다. 낯섦이 가셨는지 녀석은 장난꾸러기가 돼가고 있었다.
"이왕 왔으니 구경 좀 해볼까?"
다행스럽게도 차에 양산과 우산이 있어 하나씩 나눠 들고 다방을 나섰다. 앞서 걷던 녀석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언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언니! 건후 다 컸네. 다섯 살짜리가 행동하는 걸 보니 속이 깊은 거 같아."
"그렇게 보이니? 둘째라 그런가 봐."
입장권을 끊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더운 날씨인데도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연인들,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 한참을 옆에서 뚫어지게 바라보던 녀석은 재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는지 화상전화를 걸어달라고 말했다. 연결이 되지 않자 우울해했지만 재할아버지가 맛난 거 사준다는 말에 미소를 찾았다.
"건후야! 너 정말 예쁘다. 이렇게만 커라." 말하자 알아듣는지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스튜디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넝쿨장미가 피어있는 길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자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차문을 열자 열기가 밀려 나왔다. 출발해서 도로를 달리는데 언니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귀여운 손자 녀석의 아빠가 전화를 한 거였다. 언니가 스피커를 켜자 옆에서 뭐라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언니와의 대화 중에 오늘 늦게나 내일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잘 참는다 싶을 정도로 내색을 안 하더니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던 거다.
오후 내내 몇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귀여운 어린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다섯 살 어린아이지만 그 녀석의 말과 조금은 어른스러운 행동이 내게는 아주 큰 사람처럼 느껴졌다. 함께 한 그 시간이 너무 즐겁고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과거이기도 하지만 스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름답고 고귀한 우리 아이들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어른들이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