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의 번역가
외딴곳에 있는 대저택, 그 안에는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음식들과 평생 다 볼 수도 없는 방대한 양의 책과 영화들이 있다. 이에 더해 건강까지도 챙길 수 있는 운동시설까지도 마련되어 있는 호화로운 곳이다. 그런 곳에서의 가장 큰 제약은 자유이다. 주어진 시간에 번역을 해야 하고 바깥세상과의 소통이 없는 곳이다. 더욱 큰 것은 보안에 관련된 일에는 인권도 사라지는 억압된 공간이다. 9명의 번역가들은 이러한 공간에서 마치 닭장의 암탉이 달걀을 낳듯 번역을 한다.
이 영화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그 일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추리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말까지 본 많은 사람들은 동감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영화에서 추리가 생각보다 빈약하다는 것이다. 사건과 실마리 그리고 해결까지 자연스레 이어지기보다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이어지거나 뛰어넘은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추리라는 소재보다는 문학이라는 소재가 더욱 눈길을 끌었고 결말까지 보고 나서는 오히려 주요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을 생각하면 작품을 직접 써 내려가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시각에서 번역은 문학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작품이 다른 문화권에서 읽히게 하기 위한 하나의 기술적인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극단으로 가면 이 영화의 출판사처럼 되는 것이다. 번역가들을 기계처럼 취급해 밀폐된 공간에서 번역만 하게 한다. 영화는 이런 편견의 극단을 통해 우리가 가진 벽을 두드린다. 번역도 문학의 일부이자 예술의 영역이라고. 소설을 쓰는 작가는 조사 하나도 그것이 가진 의미로 인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문장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번역은 그러한 것을 두 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단지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닌 언어에 담긴 문화와 생각과 가치를 다른 언어로 써내려 가는 일이다. 번역을 잘못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일도 벌어진다. 전 세계가 소통할 수 있는 거리가 멀어지고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많은 문학은 더 이상 한 작가의 독단적인 예술이 아니게 된다. 번역을 거치는 순간 공동 예술이 된다. 번역은 그래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예술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구글 번역기가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학을 포함한 문화는 독단적일 수 없고 공유와 확산을 통해 가치가 확립되고 성장한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단지 촬영과 편집에 까지 이른 영상물이 영화가 되려면 관객에게 개봉이 되어야 한다. 상영을 통해 영화는 관객과 소통하며 가치가 생긴다. 문학과 영화가 모두 대중에게 읽혀야 그 가치가 생기기 때문에 상영과 출판에 관여하는 모든 이가 이 문화와 예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추리극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출판, 상영됨으로써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만드는 번역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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