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의 말과 주관의 말 사용처를 구분하기
친한 후배가 최근 인상적으로 본 영화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니도 그 영화 한번 보세요. 로튼토마토 평점이 꽤 높더라고요.”
그 표현이 생경하게 들려 흥미로웠습니다. 보통 취향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지인에게 영화를 추천할 때는 평론가의 권위를 빌려 말하거나(“그 영화 누가 별점 네 개 반 줬대”), 감독이나 출연자의 명성을 빌려 말하거나(“B감독 신작이야”), 그도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소감만을 말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후배를 보자 제가 그런 식으로 말해보려고 노력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객관적 지표를 근거로 들며 발표하는 쪽으로 말하기 체질을 바꾸려고 신경을 많이 썼었죠. 2012년 즈음의 일이에요. 십 년이 넘게 흘렀지만 그 계기가 정확히 기억납니다. 너무 확연한 변화라 잊을 수가 없어요.
스티브 잡스가 미국에서 발표한 아이폰이 2009년 한국에 상륙하면서 일상에서 많은 게 바뀌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들 사이에서 아이폰이나 갤럭시 폰이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자마자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쓸 만한 앱을 다운로드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데이터에 기반한 말하기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된 분기점을 2010년으로 봅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스마트폰 앱 서비스의 근간을 이루는 스타트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개발자와 엔지니어 품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판교 IT 회사’로 대표되는 신생 기업들이 늘어나자 문과 출신이 압도적이던 기업 경영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회사에서 제일 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개발자고, 회사에서 결정 권한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공대 출신이었죠. 그러다보니 기존에 했던 회의 방식으로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철저하게 개인화시켰습니다. 1980년대생인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가족이 동시에 보는 프로그램이 꽤 있었어요. 한 개의 리모컨과 한 대의 티브이로 콘텐츠를 공유해야 했기에 일요일 저녁 가족이 함께 거실에 앉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꼭 <개그콘서트> 같은 국민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연령대라면 비슷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 게 당연해서, 친구를 만나면 “어제 그거 봤어?”로 대화를 시작하는 게 익숙했죠.
스마트폰이 등장한 후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티브이와 각자의 리모컨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가족이라고 해서 더이상 같은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같은 세대라 해도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소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특정 업계에서는 팬이 많은 유명 인사도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경우가 많습니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하는 방식이 기업에 퍼져가고, 개인이 자기 관심사에 기반한 콘텐츠를 제각기 소비하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일반화되면서 2012년 즈음부터 회사에서 기획회의를 할 때 정량적 평가를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중문화의 지형이 급격하게 변모하며 ‘인기 있다’의 기준이 사람마다 너무나 달라졌고, 신생 스타트업의 보고 방식인 ‘전례에 기대지 말고(어차피 기댈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목표를 확실하게 숫자로 말하라’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 영향이죠.
기획회의를 할 때 이전에는 “요즘 제 주변에서 이 사람의 콘텐츠를 참 많이 보더라고요” “최근에 간 이 행사가 무척 좋았는데 우리 회사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라고 경험을 공유하며 샘플을 보여주면 충분했고,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서로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선배들에게도 그렇게 일을 배웠죠.
그런데 2012년 즈음부터는 자신과 자기 주변의 취향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고 협소한 생각만 밀어붙이는 이로 비치더군요. 설득력이 있으려면 목표 조회 수, 인터뷰이의 팔로어 수 등 ‘숫자’를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업무 평가 때도 이전에는 제가 만든 콘텐츠를 선배들이 돌려 보며 피드백하거나 독자들이 보내주는 리뷰를 참고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콘텐츠의 조회 수, 화제성, 댓글 개수 등으로 평가 방식이 확 바뀌어버렸어요.
저는 이제 주관의 언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직장 내 화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최근 제 주변에는 이것에 관심이 있다”는 표현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이 해시태그가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상승했다”로 바뀌었고, “가을에는 대체로 사람들이 이런 콘텐츠를 많이 봅니다”라는 표현 대신 “월별 키워드 검색량 순위를 보면 매년 10월에는 이 키워드가 급부상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게 되었죠.
회의실 안에서만큼은, 회의 자료를 만들 때만큼은 그렇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데이터를 제시하고 목표 지향적으로 이야기하는 소위 ‘공대생처럼 말하기’의 흐름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일반적인 기업 내 소통 문화로 완전히 자리잡은 듯합니다.
과학자처럼 말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
2020년 이후로는 그 변화에 더해 ‘과학자처럼 말하기’의 흐름이 감지됩니다. 과학자처럼 말한다는 것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한 뒤 증명이 가능한 근거나 이론에 기반해서 주장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뜻하죠.
자기계발의 트렌드도 그 배경에 뇌과학을 언급하는 경향이 커졌습니다. 공부도, 다이어트도, 집중력이나 중독 문제도 과학자나 의사가 나와 ‘네 탓이 아니고 뇌 탓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쪽으로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비과학적인 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팩트가 필요하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체감한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바를 믿고 따라야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깨달았죠.
그렇다면 과학자의 말하기란 어떤 걸까요? 대중적으로도 인기 많은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예능에서 다른 패널들과 의견을 나눌 때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일단 그 질문의 정의부터 분명히 해야 하는데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겁니다.
그가 평소 존경한다고 말해온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에도 이와 유사한 대목이 나와요. 파인먼은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토론회에 갔다가 다들 저마다의 주장만 하고 있다고 느끼며 충격을 받았던 일화를 들려줍니다.
‘평등의 윤리’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참석자 모두가 자신의 관점만 이야기했다고 해요.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요. 예를 들어 역사학자는 평등의 윤리가 진화하고 발전한 양상을 봐야 한다고 했고, 국제변호사는 여러 상황에 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살펴야 한다고 했죠. 예수회 신부는 이론적인 개념만을 이야기했고요. 이에 대해 파인먼은 모두가 토론에 참여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꼬집습니다.
대화를 통해 결론으로 나아가려면 우선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명확히 해서 주제를 좁힌 뒤에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파인먼은 그러지 않고 자기 말만 하고 있는 학자들을 가리켜 “거만한 바보”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만한 바보들의 대화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게 과학자의 지적이죠.
회사에 다닐 때 프로처럼 보이기 위해 공대생처럼 말하려고 노력했던 저는, 요즘 과학자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방식을 참고하려 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처럼 말한다는 건 확신을 가진다거나 남의 말을 달달 외워서 자주 인용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요.
과학자처럼 말한다는 건 일단 최소한으로라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해두고 시작하는 거예요. 과학자가 이론을 주장 하기 전에 선행 연구를 충분히 훑어보듯, 여러 가설을 검토해본 뒤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개인적 믿음과 사실의 영역을 혼동 하지 않고, 오랫동안 천천히 증거를 모아뒀다 직접 보여주는 거죠.
거기에 더해서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쓰고 있는가, 주장의 근거나 출처를 충분히 검토했는가, 백 퍼센트라는 건 세상에 없으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일 유연함이 있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과학자처럼 말하기의 요소 같아요. 설득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키우기 전에요.
‘스마트폰 중독은 도파민 문제다’라는 말과 ‘스마트폰 중독은 의지의 문제다’라는 말의 차이에서 보듯, 어떤 사람의 말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투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구시대적 논리나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고수하기 때문일 때도 많습니다. 유행어를 몰라서 올드한 게 아니라 사고방식이 옛날에 머물러 있으면 낡은 사람인 거예요.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시대 흐름을 확인하고 말하는 방식을 자각하면서 계속 업데이트를 시도해야겠지요. 시대감각이 있으면 신선한 말하기, 신뢰받는 말하기를 하기 쉬우니까요.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회사에서 공대생의 언어에 익숙해지더라도, 과학자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참고하더라도 그것을 유일한 지향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시청률로만 드라마를 평가할 수 없고 판매 지수로만 책을 판단 할 수 없듯 숫자만을 내세운 판단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에서도 인재를 평가할 때 정량적 평가와 정성적 평가를 동시에 하고 있지요.
객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할지라도 감정이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꾸준히 개발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사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르네요. “○○○ 님이 몇시 몇분 사망하셨습니다”라는 사망선고를 할 때 ‘사망’이라는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고 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들려서요.
그는 사전에서 유의어를 찾아본 뒤 작은 애도의 의미를 담아 ‘임종’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말할까’라는 고민만 있었다면 시도할 수 없던 변화겠지요.
문학 또한 어떻게 하면 더 구체적으로, 더 아름답게, 개성 있게 표현할지를 고민하는 데서 세공되는 언어 예술입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예술은 주관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활동이고요. 그걸 보며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숫자로는 머리를 움직이게 할 수 있지만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어요. 객관의 언어와 주관의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용법을 제각기 익혀서 때에 맞춰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객관의 언어와 과학자의 언어는 주로 회의실에서, 공감의 언어는 집에서 활용하는 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