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나 판단은 줄이고 다만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
사회 초년생 시절, 잘 몰라서 범한 실수가 참 많지만 그중 유독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례하게 굴었던 일이죠. 잡지사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당시 제가 담당하고 있던 칼럼은 두 작가가 번갈아서 원고를 싣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았죠.
어느 날, 종료 시점을 정해두지 않은 상태로 육 개월가량 연 재중이던 그들의 칼럼이 회사 내부 사정으로 급히 중단되었습니다. 이유를 구체적으로 쓸 순 없지만 A라는 작가가 쓰던 칼럼의 내용이 회사 상부에서 보기에 불편한 부분이 많았던 탓이었어요. A의 칼럼이 문제시되면서 그와 교대로 연재하던 B작가의 칼럼도 함께 중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풋내기 시절 처음 경험하는 대형 사고였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우선 전화를 걸어 상황을 간곡하게 설명했을 텐데, 패닉에 빠진 저는 두 작가와 그런 내용으로 통화를 하는 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드리고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의 메일 한 통만 보내버리고 말았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메일을 보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A작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가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몸마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죄송합니다. 저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받은 지시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연재를 중단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작가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당신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으니 당장 대표 연락처를 내놓으라고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듯 외쳤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방금 갑작스럽게 연재 중단 통보를 받았다며, 회사가 특정될 수 있는 표현을 쓰면서 거세게 비난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같은 날, B작가에게 짧은 회신이 왔습니다. 상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내용 확인하였습니다. 당황스럽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기자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죠. 다시는 이처럼 갑작스럽게 통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 더, 모르시는 것 같아 알려드리는데 이 경우에는 기자님이 제게 메일을 보내기 전에 전화를 걸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을 구두로 설명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두 사람을 비교해서 A작가가 비상식적인 언행을 했다거나 과도하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백번 따져봐도 저는 잘못한 게 맞고 A작가의 분노는 정당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대처법을 보면서 절절하게 배운 바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A작가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을 때는 이후 제가 해야 하는 행동에 대해서 배우기 어려웠습니다(물론 그가 저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초식동물처럼 얼어붙은 채 허둥지둥 사과하기에만 바빴죠. 솔직히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강렬했습니다.
반면 B작가가 침착하게 요구 사항을 이야기하고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해준 덕에 저는 지난 행동을 짚어보며 앞으로 절대 하면 안 되는 언행 하나를 제대로 배웠습니다. 불편한 것을 정확히 말하고, 원하는 것을 우아하게 알리는 일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행동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죠.
평가나 판단은 줄이고, 요구는 키우고
그날 이후 저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마음이 들 때 ‘이 사람이 정말로 몰라서 실수하는 것일 수 있다’고 가정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제대로 모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것이 문제임을 알더라도 ‘그런다고 별일 있겠어’ 하며 게으르게 생각했다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상대에게 인격적 결함이 있다거나, 저를 무시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상종 못할 인간이라고 속으로 ‘아웃’을 외치고 마음에서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누르곤 했죠.
다음으로 화를 내기 전 제가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화를 퍼부으면 당장 기분이 후련해질지는 모르겠으나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홧김에 심한 말을 내뱉고 뒤끝이 찝찝해질 뿐이죠. 상대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당한 가혹함에 섭섭해하는 경우가 더 많고요. 그래서 저는 이 행동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모르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순차적으로 말하는 법을 연습했습니다.
지금도 남편과 싸울 일이 있으면 이처럼 기분 나쁜 포인트를 정확히 짚은 후 요구 사항을 종이에 써서 정리해본 뒤 이야기를 나눕니다. 반대로 말하면, 정확히 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거나 요구 사항이 분명치 않다면, 스스로 명확해질 때까지 자기 마음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모르셨거나 실수라 생각하니 앞으로는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다”라는 대사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 육 개월마다 한 번씩 바뀌던 대학생 인턴에게도 종종 사용했습니다.
밤늦게 카톡을 보내는 인턴에게는 “모르실 수 있을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밤 열한시에는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카톡으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카톡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건 가급적 업무 시간인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일곱시 사이에 해주세요”라고 설명했습니다.
메일을 보낼 때 번번이 ‘제목 없음’ 상태로 발신하는 인턴에게는 “혹시 모르실까봐 말씀드립니다. 메일을 ‘제목 없음’으로 여러 번 보내셨더라고요. 이러면 업무상 확인해야 하는 많은 메일 가운데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하고, 추후에 받은 메일을 검색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도 찾기 어렵습니다. 제목에 간단히 용건을 써주면 좋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회신해주었죠.
평가나 판단은 줄이고 다만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되 꼭 필요하다 생각되는 대응은 하기.
이십대에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해서 부정적 감정을 관리하고자 노력했고, 이제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표현하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제가 사회 초년생일 때 저지른 거대한 실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없던 일로 하고 싶던 저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된 이유도 최근 있었던 불쾌했던 일 때문입니다. 그런 걸 보면 업보는 결국 돌아오는 게 맞나봅니다.
10월의 어느 날, 한 회사에서 지방 강의를 요청해왔습니다. 집에서 차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어요. 봄과 가을은 여러 대학이나 도서관 행사로 가장 바쁠 때입니다. 여유가 없는 시기라 난색을 표하자 강의 후 일박을 할 수 있는 숙소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하더군요. 강의에 겸해 이틀간 가족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듯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행사 일주일 전인 토요일 저녁 담당자는 내부 사정으로 강연이 어려워졌다고 카톡으로 통보했습니다. 저로서는 동일한 날짜의 강연료가 더 큰 행사를 거절하고, 여행을 가기 위해 가족과 스케줄을 조정해놓았기에 피해가 컸죠. 불쾌했지만 계약서를 써둔 것도 아니어서 정당하게 보상을 요구할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 결정을 담당자 혼자 내린 건 아닐 테니 사과를 받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저는 알겠다고 답한 뒤, 이전에 그 회사와 진행했던 다른 건의 비용에 대해 청구서를 발급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을 회사니까 빨리 정리해두고 싶었거든요. 제가 사전에 안내받은 비용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자 그는 “네. 월요일에 다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저는 필요한 서류를 보내두었어요. 한참 뒤, 밤 열시가 넘은 시간에 이런 카톡이 왔습니다.
“급하시네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백 개 떠올랐죠. 제가 “급하시네요, 라고요?”라고 답하자 상대에게 이렇게 회신이 왔습니다.
“카톡을 다시 잘 읽어보세요. 비용 관련해서는 제가 월요일에 다시 안내해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네’는 제가 비용을 확인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던 거죠. 저는 “카톡으로는 그만 이야기하시죠. 월요일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쓴 뒤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말실수를 할 확률이 커지니까요. 주말이 지난 뒤 관계자들에게 메일을 썼습니다. 그때 쓴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갑자기 행사 취소를 통보하셔서 당황스럽고 불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 님의 후속 조치에 제가 느낀 불편함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님은 제가 드린 질문에 충분히 오해할 만한 답변을 하셔놓고, 주말 밤 열시에 저에게 ‘급하시네요’라고 비난하는 듯한 카톡을 보냈습니다. 이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남을 지적하는 말하기 대신 쓸 수 있는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계산서 발급해주신 걸 확인했습니다. ○○만 원으로 금액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 경우에는 이러저러한 규정이 적용됩니다’와 같이 커뮤니케이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사과를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님이 계속 이와 같이 커뮤니케이션한다면 향후 여러 문제가 불거질 수 있음이 우려스러워, 이 메일을 씁니다.”
그날 오후 회사의 담당자에게서 전화와 메일이 왔습니다. 내부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했고 사과를 전한다고 했지만 그때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메일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는 과정에서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불편함을 애써 참지도, 그렇다고 무작정 화를 내지도 않고 제가 겪은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으니 말입니다. 상대에게 사과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상황은 더 커지지 않고 마무리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어떤 말을 일단 쏟아내고 싶을 때, 대응하는 템플릿을 여러 개 만들어두고 상황에 맞게 내용을 채워보기를 추천합니다.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화를 표현하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다보면 감정만 상할 뿐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할 때가 많으니 일단 그것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대체로 말은 즉 시적으로 감정의 강도를 키우는 데 유리해서 우선 내뱉은 다음 후회할 때가 많지만, 글은 쓰기 시작하면 논리적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머릿속에서 바로 튀어나올 때보다 언제나 훨씬 나은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게 분노의 말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