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대표적 기술, 글쓰기
한 기업에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러 갔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일은 잘하지만 인성이 나쁜 상사, 일은 못하지만 인성은 좋은 상사, 둘 중 한 명을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후배였다면 인성 좋은 사람으로 할 겁니다. 태도만 좋다면 일은 제가 가르쳐주면 되니까요. 그런데 상사라면 인성이 나쁘더라도 일 잘하는 사람으로 하겠습니다. 회사는 결국 결과로 평가받는 곳인데, 끝이 좋다면 당시에는 힘들었더라도 후에 돌이켜보고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재해석할 수 있거든요.”
가끔 어떤 대답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들러붙어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굳이 그렇게 말해야 했나? 설사 그리 생각한다 해도 공식적인 장소에서 그대로 말할 필요가 있었나? 그렇게 끝내버리지 말고 그럼에도 세상에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 좋았을 텐데.’
저는 미진했다고 생각되는 답을 한 후엔 늘 오답 노트를 작성하는 심정으로 대본을 써봅니다. 물론 쉽진 않아요. 했던 말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도 좀더 나은 버전으로 고쳐보려니 딱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정 자체가 곧 선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말은 타인을 다독 이는 위로로 쓰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실패한 이의 변명이나 자기 위안 정도로 느껴질 때도 많고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결과가 좋으니 잘된 거지’라고 할 수는 있지만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결과가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현재를 겪을 때는 사는 데 급급해서 지금의 과정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거든요. 시간이 흐른 뒤 추억하면서 기억의 방향을 수정하고 편집하지요. 끝이 좋으면 각고의 고생들이 겪고 지나가야 했던 성장통 같은 거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앞의 강의 때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은 덮어두고 있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장강명 소설가의 칼럼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나이들수록 콘텐츠 부재가 탄로 나기 마련이니 운동으로 근육을 만들듯 꾸준히 독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소설가로서 사람을 예리하게 보게 되었다는 식으로 흥미롭게 도입부를 열고는 대화할 때 지루한 사람들의 특징을 세세히 분석한 글이었는데요. 무엇보다 청년이 아닌 중년을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참신해 자기계발의 욕구가 있는 중년이라면 자극을 받을 법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가위로 오려내 남편 책상에 올려두었습니다. 다음날 남편이 읽어봤다면서 감탄하더군요.
“작가들은 참 대단해. 책 좀 읽으라는 그 한마디를 그렇게 길게 늘여 쓸 수 있다니.”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아. 글이란 게 원래 결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
가끔 어떤 경우에는 찾아다니던 답을 본인이 무심코 한 말에서 찾을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남편의 말에 답을 하고서 느꼈습니다.
‘아, 맞아. 결과보다 과정이 훨씬 중요한 거라면 글쓰기가 대표적이지. 그게 바로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던 이유지.’
글쓰기야말로 과정이 결과(결론)보다 훨씬 중요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무조건 참신한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니까요.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험과 개성을 살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작가들은 문장을 다듬고 에피소드를 늘리고 자르고 붙이기를 반복하는 거죠. 많은 작가들이 무엇에 대해 쓸지 결정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선택한 주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쏟습니다.
‘무례함’을 ‘다정함’으로 바꾸는 작은 차이
글쓰기뿐 아니라 말하기도 ‘어떻게’가 핵심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머레이비언 교수는 언어보다 비언어적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의사소통의 93퍼센트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비언어적 형태를 통해 전달되고, 그중 38퍼센트는 음조나 억양 등의 청각적 요소, 55퍼센트는 표정이나 자세 등 시각적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내용 자체보다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설득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읽는데, 이런 표현이 나오더군요. 강연장에서 할머니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작가님이 결혼을 할까? 아이를 낳을까? 엄마가 될까? 그런 게 너무 궁금해요, 나는.”
이 말에 청중이 웃었지요. 요즘은 실례라고 생각해서 잘 하지 않는 질문이니까요. 우리는 보통 이런 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례한 말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다정한 사랑의 언어로 말하면서 상대가 잊을 수 없는 표현으로 바꿔버립니다.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삶이 달라지겠어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저 또한 아이 없이 결혼생활을 삼 년간 했을 때, 출산을 장려하는 이야기를 왕왕 들었습니다. 그때 제 귀에 꽂히지 않고 흘러간 말들, 심지어 때로는 반박하고 싶어지는 말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어요.
“결국 나중에 부부를 이어주는 건 아이밖에 없더라.”
“일단 낳아놓으면 아이는 알아서 큰다. 다 자기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야.”
“엄마한테 딸은 하나 있어야지.”
“젊을 때 빨리 낳아. 늦어지면 낳고 싶어도 못 낳는다.”
오히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만 공고히 해줄 뿐이었지요. 똑같이 엄마가 되라는 소리임에도 제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은 말은 이러했습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아이 키울 때가 제일 행복했어.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한번 살아보는 것 같기도 해. 그걸 너도 꼭 느껴보면 좋겠다.”
“엄마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서 관점이 바뀌고 처음 해보는 경험이 많아지면 또다른 이야기가 쌓일 거야. 작가로서도 그게 도움이 될 거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이를 안 낳을 거라고 했었지? 내가 보기에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렇다면 좋은 엄마도 될 수 있어.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이유라면 고민 안 했으면 해.”
이십대에 이런 농담을 들은 적 있습니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지. 지방에 가서 술 마시고 여자를 만난다.”
어릴 때는 그런 식의 단순한 호쾌함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홍상수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완전히 다른 버전을 기대하기보다 그의 시선을 더 좋아하는 것일 테니까요.
한마디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습니다. 요약해서 말해달라고, 결론이 뭐냐고 묻는 사람은 배움으로 도약하지 못합니다. 앎은 정답을 빨리 아는 데 있지 않고 풀이 과정에 몰입하는 데 있으니까요.
현실적으로는 인생에서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경우가 많지만 최소한 말과 글에서는 결과(결론)보다 과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스토리 자체보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기법이 중요해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소재가 지루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니까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헤맬지언정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힘으로 자기의 속도와 온도를 지키며 갑니다. 글과 말을 연마하면 과정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기의 과정을 믿을 수 있으면 세상의 평가에 덜 휘둘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