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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Jun 04. 2024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연습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다면 마음도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미술 시간이 되면 24색이나 48색 크레파스를 넓게 펼쳐놓은 친구를 힐끗힐끗 보곤 했습니다. 12색 크레파스만 가진 저와 달리 분홍색, 고동색, 금색…… 갖가지 색으로 그림을 쓱싹쓱싹 그려나가는 걸 보면서 잠깐 빌려달라고 해볼까 생각하며 침을 꼴깍 삼켰지요.


색이 많으면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그릴 때도, 여름날 숲속 풍경을 그릴 때도, 뛰노는 친구들을 그릴 때도 다채롭고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는 교양의 가장 큰 역할을 ‘쪼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배운 사람, 즉 언어가 있는 사람에겐 쪼갤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는 거죠.


그는 이를 해상도에 비유했습니다.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차이를 분별해서 더욱 섬세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48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더 세밀하고 다채로운 언어를 사용하면 글 역시 풍부해지고 삶의 해상도도 높아집니다.


저는 ‘이거나 저거나 그게 그거’라며 뭉뚱그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글을 써왔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각종 어휘를 넉넉히 구비해왔어요.


그림을 그릴 때 색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듯, 글을 쓸 때는 알고 있는 어휘가 많아야 이를 활용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밀고 갈 수 있으니까요. 매일 책을 읽고 모르는 단어는 찾아보고 외우면서 제 안에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글을 쓸 때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들을 머릿속에 소장중인 어휘들과 일대일로 짝지어나가는 것이 글의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 판을 준비하는 조판공처럼 중간에 흔들리지 않고 결론까지 뚝심 있게 밀고 가야 힘이 생깁니다. 적확한 단어를 고르는 데 힘을 써야 하지요.


반면 말하기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기본입니다. 상대의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현재 관심사가 무엇일지, 기분과 상황이 어떨지, 상대가 궁금해하는 게 무엇일지 등을 감안해 질문합니다. 그걸 파악해야 말의 순서를 정리하고, 정보량을 조절하며, 멈출 때 와 계속 써나갈 때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또, 말을 하는 순간에도 타인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편안하게 나눌 수 있을지 자문합니다. 보다 부드럽고 친절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애쓰고 청중의 반응이 어쩐지 시큰둥하다면 즉석에서 예시를 바꿀 필요도 있지요.


글쓰기를 할 때는 마음속으로 잠시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말하기를 할 때는 창을 활짝 열어두어야 합니다. 글쓰기에만 집중하던 시절 저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에만 몰두하다가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후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편안하게 말하기’로 목표를 바꾸자 놀랍게도 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거든요.



사진: Unsplash의Anna Zakharova



우리집 네 살배기 아이 이수호 군은 한창 말과 글자를 배우고 있습니다. 평소엔 재잘재잘 세상 희한한 소리는 다 하다가 화가 날 때면 울먹이기만 하거나 “싫어”를 반복할 때가 있는데요.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럴 땐 잠시 기다렸다가 진정이 되면 “그런 마음이 들 땐 이렇게 말해봐.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똑같이 해보는 거야”라고 알려줍니다. 이러한 자기표현의 기술은 제가 간절하게 찾아다녔던 조언이었습니다.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에는 이처럼 제가 듣고 싶었던 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이야기만 담았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말과 글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일상에서 하나씩 시도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은 마음 관리와 언어 관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둘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다면 마음도 잘 다룰 수 있습니다.


고아라, 전민지, 김수현 편집자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뭐라고 이런 책을 쓰나’ 고민하는 고질병 때문에 글쓰기를 자꾸 멈추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격려해주셨기에 끝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이유가 과자 한 봉지를 한꺼번에 다 먹기 위해서라던 아이, 수호의 키가 아빠와 비슷해질 때쯤 이 책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네가 말하기 연습을 할 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언제나 응원하고 사랑해왔다고 말해주면서요.


제가 글을 쓸 수 있도록 함께해주시는 독자들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노트북 앞에 앉았지만 막막할 때면 문득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두려워지곤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메일함에 저장해둔 독자들의 편지를 꺼내봅니다. 오래오래 쓰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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