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3.금요일 오전 11시 12분
쓴다는 건 그래, ‘상당한 위험’ 인지도 모르겠다.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 자연의 법칙대로 흘러가버릴 것을 흘러가 사라질 것을, 쓰는 것은 그런 것을 붙잡아두는 일이므로, 잠시나마 붙잡아 매는 일이므로. 무한을 1로 만드는 일. 분할되지 않는 것을 애써 분류하는 일, 그대로 두면 아래로 처질 팔을 들어 올리려고 노력할 때와 같은 행위. 중력을 거스름.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작가로서,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걱정한 것처럼 이 경험을 바탕으로 비좁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그러니까, 이것을 읽은 누군가에게는, 이전의 내 모든 소설과 앞으로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달라붙는 글이 되지는 않을까. 내 모든 글이 이 경험을 기반으로 읽히지는 않을까.”(p.179 황정은 『일기』)
<흔>이라는 산문에서 황정은은 7살 때 당한 친족 간 성폭력에 대해 썼다. 위의 우려는 그 글의 일부이다. 폭력의 진상을 밝혀나간 문장 하나하나가 나, 독자에게 달라붙었다. 저자가 우려한 대로 바로 읽기 시작한 작가의 다른 작품집 『아무도 아닌』의 <웃는 남자> 속에서 “내 잘못이 무엇인가(p.177)”,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p.178)”,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p.179)” 같은 페이지마다의 문장들에서 나는 화자가 아니라 저자를 떠올렸다.
황정은이 『일기』에 쓴 “이런” 것은 그냥 두면 흘러가버려 사라질 것이기에 그냥 사라지지 않고 폭력 당한 당사자인 저자를 살아있는 동안 내내 할퀴고 해체시킬 것이기에 쓰여야 했었다. 그러나 씀과 동시에 저자는 위험에 빠진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들이 곧 내 친척이고 부모 형제”라서 가해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기가 어렵고 관계가 단절될까 봐 두려”운… 고통.(p.182 황정은 『일기』) 더불어 소설가로서 자신이 작품이 자신이 당한 일과 관련해 읽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냥 놔두면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그 일이 달라붙을 것이므로 이제 나는 애써 그 자동성을 잠시 저지시키고 방향을 0.0…1도 틀어보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 그 일이 떠오르고 그 일을 그의 많은 소설과 연결 짓게 하는 이 자동성은 강력하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힘이 세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나도 문장 안에 가둔다. 많은 것이 탈락되고 말 위험, 일반화의 위험, 통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쓴다. 잘 읽기 위해.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작품으로서 읽고 느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