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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Nov 23. 2021

감정도 클리셰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이야기에만 클리셰가 있는 건 아니다. 감정에도 있다, 아주 많다. 텔레비전화면에 나오는 인물이 눈물을 쏟고 있을 때 코끝이 맵고 목젖이 뻐근해질 때. 그 인물의 감정에 동화된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겠다. 공감이라는 말은 긍정적 의미로 쓰인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상대방의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는 능력으로. 


뫼르소(알베르 까퀴, 『이방인』 )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 '울지 않았고',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는다. 공감에 무능력한 자는 동정 받지 못한다. 그러나 눈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죽음 앞에 슬픈 표정은 감정의 클리셰이다. 어쩌면 이 클리세 안에는 최고로 공감에 무능력한 자가 들어앉아 있다. 개인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보여줄 것 같았던 감정은 많은 경우 몸의 습속에 종속된 것이다. 


물질인 몸은 물질의 작동을 따른다. 이 작동은 기계적이다. 클리셰에 반하는 이야기를 위해서 말을 쪼개고 쪼개야 하듯이 반 클리셰 감정이 되려면 감정을 쪼개야 한다. 두 가지는 따로 놀지 않는다. 감정을 쪼갤 수 있어야 말도 쪼개진다. 말을 쪼개는 연습을 통해서 감정도 쪼개진다. 쪼개진 감정은 단지 눈물, 단지 슬픔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때서야 감정은 그 만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담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 클리셰와 쪼개진 문장,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뾰족하게 독해하기 위하여』


'똑같은 이야기'를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이 말은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어원은 인쇄 용어다.


클리세의 난점은 식자공이 활자를 다발로 다루듯이 독자도 정형구가 나오면 다발로 건너뛰고 다름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음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클리셰의 반대 개념을 딱히 표현할 말이 없는데 일단 '반 클리셰'라고 해 두자. 반 클리셰는 '자신이 지금 말하는 메커니즘 자체를 소급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 자신이 지금 쓰는 말의 운동을 언어화… 


언어는 내부로 쪼개면 쪼갤수록 무한한 유쾌와 힘을 만들어 낸다. … 클리셰 역시 말이 실처럼 끊임없이 뽑아져 나오듯이 보인다는 점에서 얼핏 '반 클리셰' 문장과 비슷하게 보인다. … 그러나 그것은 개수대에 연결된 수도관 같은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말은 넘쳐 나오지만 모두 그 사람과 그의 동족인 '클리셰 사용자'에 의해 가혹할 정도로 혹사당하고 닳고 닳아서 손때가 묻고 오물 범벅이 된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말을 쪼개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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