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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Nov 11. 2021

고통의 언어가
과장될 수밖에 없는 이유

'북극 추위'가 한 걸음 물러난 아침인데 등은 시리다. 이불속에서 나오자마자 여느 아침처럼 솜 조끼를 끼어 입고 아침 상을 차렸다. 설거지까지 마쳤는데 오늘은 아직 몸이 데워지지 않는다. 한기는 바깥공기와 상관없이 내 몸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다. 냉기 발전소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므로 유난 떨 일도 아닌데, 그래도 어떤 날은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다시 이불속을 파고들게 된다. 윤이 들어와서 자기 침대에 잠깐 누우라 한다. 그래 거긴 전기장판이 깔려있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딸의 침대로 들어갔다. 온도를 최대로 올리고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어느새 잠이 들고 깨니 외출 준비를 끝낸 딸이 침대맡에 와서 곧 나간다 한다. 마음은 일어났지만 몸은 아직 그대로인 채로 "아이 발목이야 발목이 쑤셔"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그냥 흐른 말이다. 내 발목을 살짝 한 번 누르고는 스치듯 멀어지는 윤이의 손길. 그러고는 안녕하며 나갔는데 그 순간, 발목을 눌렀던 무게감이 사라질락 말락 할 때 알게 되었다. 어머니들의 고통의 호소가 왜 그렇게 극단적이고 과장되고 마는지를.  


두 어머니는 아프다. 꼭 집어 질병명이 확정되지 않은 '여기저기 아픈' 분들이다. 몸에 좋다고 소식小食을 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보다 나쁜 날이 더 많은 노인들이다. '아이 고고' 소리가 저절로 아주 빈번하게 흘러나오는 게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연세. '아이 고고'를 뭔가 의미 있는 말로 하려 애쓸 때가 있다. 이땐 많은 것이 덧붙여진다. 당신들이 느끼는 아픔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해 한정된 단어들 속에서 가장 센 것을 고르고, 듣는 상대의 태도 역시 고려된다. 가능한 모든 것들이 고려되었다 해도 말은 언제나, 누구나에게나, 주관적이고 과장이고 비유고 은유이다. 실재 아픔과 그 아픔을 표현하는 언어 사이에는 완벽히 포개지지 않는 절대적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내 오랜 등 시림에 대해서 나는 '등에서 냉기가 쫙쫙 퍼져 나온다'라고 표현한다. 그게 나로서는 내 냉기에 최대한 가까운 표현인데, 내 등을 만지는 다른 사람들은 '좀 차네~' 그런다. 내 손으로 만져봐도 딱 그 정도다. 좀 차다. 이 '좀 참'으론 몸 전체로 퍼져서 뜨거운 장판에 누워서도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되는 냉기다.'좀 참'으론 설명이 안 된다. 그러니 냉기를 표현하는 말은 과장되어야만 한다. 딱 떨어지는 말, 통증의 양과 정도를 보여줄 수 있는 말은 없고 따라서 과장과 은유와 비유는 언어가 자신에게 부재하는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법이다. 그렇게 어머님들도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표현이 아무리 극단적이고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엔 그들의  어떤 의도보다 언어 자체의 속성이 더 많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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