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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Aug 10. 2022

[프롤로그] 먹이는 자와 먹는자로 이뤄진 우주

아이가 있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먹이는 것이 얼마나 깊고 넓은 우주인지를...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받거나 스스로를 위해 음식을 챙겨먹는 행위는'나'에 머문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상대의 세세한 상황(식욕부진, 질병, 생일 등)에 맞춰 음식을 만들고 세팅하고, 먹이는 행위는 '나'를 넘어선다. 일명 먹이는 자와 먹는 자들로 이뤄진 세계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대상처럼 예측불가의 신비함 투성이다. 마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처럼.   


먹이는 자는 먹는 자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이 잘 수용되도록 하기 위해 먹는 자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먹는 자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은 어떤지, 오늘 하루 상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을지부터 잠시 후 어디에 갈 것인지, 그 상황에서 먹일 때는 어떤 음식이 좋을지, 최근 취약한 영양소는 무엇인지, 취향은 어떤지... 먹이는 행위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행위 그 이상을 포함하는 것이다.


먹는 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먹이는 자의 개입이 크다. 만약 잘 먹이는 것이 음식의 맛에 좌지우지 된다고 가정한다면, 먹이는 자의 요리 실력은 먹는 자의 신체발달과 건강에 결정적일 것이다. 그래서 만약 먹는 자는 음식을 잘 먹지 않고, 먹이는 자의 요리 실력 성적표는 줄곧 낮은 점수를 면치 못한다면?  "음식이 맛있어봐라? 안먹고 베겨?"라는 게 사회적 통념이라면? 먹이는 자는 '요리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먹는 자의 신체발달이 늦고 약한 것이 자신의 요리실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 뼈아픈 가정은 끊임없는 테마를 양산헌다. '먹는 자의 기질', '먹이는 자의 성격', '고유한 미각' 등등.


먹이는 자로 산 지 10년차. 나의 요리 콤플렉스는 그간 곪고 곪았다가 몇 번은 터지길 반복한 것 같다. 나는 요리와 관련된 수많은 상징의 고름들을 나만의 해석으로 닦았다. 이를테면, 먹이는 행위에는 '존재성'의 정도가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아가 강한 이들은 타인을 고려하는 음식이 아니라, 자신이 주고 싶은 음식을 주기도 한다. 자신이 주고 싶은 음식이란 자신이 만들기 편한 음식, 만들고 싶은 음식, 잘 만들기에 인정받고 싶은 음식, 상대의 입맛과는 상관없이 상대가 먹으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음식, 본인이 좋아해서 공유하고 싶은 음식 등이 그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게 되면 존재성이 강한 나는 먹는 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강요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이제까지 내 위주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자책마저 든다.


먹이는 것은 소통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서로 소통하면 길들여지고 닮아가듯이 먹이는 자와 먹는 자의 미각도 닮아간다. 먹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먹는 자는 먹이는 자에 의해 길들여진다. 보편적 미각에 각 가정의 특수한 미각까지 더해져 먹는 자는 그만의 고유의 미각을 갖게 된다. 보통보다 더 섬세하게, 더 깐깐하게 혹은 더 무디게, 더 낯설게 느끼는 미각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미각이 주관성을 띈다는 사실은 텐션 높은 내 요리 콤플렉스를 완화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만의 다양한 해석들은 쌓여간다. 하지만 여전히 섬세하고 예민한 딸을 식성좋은 딸로 만드는 길은 요원한 것 같다. 잘 먹이는 방법을 연구하기보단 먹이는 우주는 생명체의 비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넘겨버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격대로 산다고 했던가? 나는 순리에 따르기보단 최선의 효과를 얻기 위해 순간 순간 발버둥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딸 둘 엄마의 요리 콤플렉스로 생긴 고름들은 매번 생기고 닦이는 작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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