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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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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an 27. 2023

무지개색 유년기

응답하라 1980년대... 어떤 40대의 그때 그 시절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 버린 유년기의 친구들. 지금은 희뿌연 안개 정도의 자취도 남지 않았지만 그때를 떠올려보면 내 일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존재들이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송아와 얼굴이 하얗고 다소 새침한 지연이를 기억한다. 그 외에 명실이나 몇몇 친구들이나 그들의 동생들과 어울려서 하루를 보냈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기억나는 이름은 그들 둘 뿐이다.

김송아와 이지연. 김일중 씨네 집 앞 공터를 지나 가파른 언덕(그때의 기억엔 그랬는데, 지금 보면 작은 둔턱 정도지 않을까 싶다)을 오르면 나오는 기독교 계열 '유치원'(세나유치원이었다. 중요했던 건 잊혀지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만났다. 당시 유치원에서 했던 미술 활동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유치원 주최로 하는 사생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곤 했으니 그림 그리기는 내 몇 안 되는 자부심 중 하나였을까? 하루는 유치원 미술활동으로 속이 텅 빈 계란 껍데기 위에 그림을 그려서 고이 가져오는데, 내 그림이 그들과 비교해서 만족스럽지 않던 차에 내 것만 깨져버려서 얼마나 속상하던지... 속에서 부글대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나는 다소 그들과 잘 어울리다가도 하루는 무슨 일인지 송아와 틀어져서 너무 억울한 생각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계속 꿈틀대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방문을 열고 나가 공터에서 따져 물었다. 그때가 7살 무렵이었나? 내 최초의 적극적인 공세였다. 매번 당하고 오는 일이 잦았던 내가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얼떨떨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른 그런 나 자신이 낯설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2살 터울의 동생과 간식을 먹다가도 뺏기곤 했는데, 그러고 나서 나는 동생 것을 빼앗기보다는 달라고 조르는 편이었다.) 송아에게 말발이 밀려 싸움 끝엔 더 억울해지는 상황이 되었지만, 감정이 해소되는 쾌감 때문일까? 묘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송아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었고, 송아는 교회를 운영하는 집에서 자라 여러 교인들 틈바구니에서 섞이는 걸 잘했다. 그녀의 엄마보다 더 친절한 젊고 예쁜 고모나 공부 잘해서 초등학교 전교 부회장을 한다는 그녀의 의젓한 오빠들의 존재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앞니가 빠져서 헤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다 보면 그런 부러움이 싹 가셨다. 우리는 너무도 편한 친구였다. 한 번은 그녀의 집에서 놀다가 그녀의 아빠와 엄마의 키를 유심히 보게 됐는데, 그녀의 엄마의 키가 아빠보다 커 보였다. 키가 큰 아빠와 작은 엄마의 키가 무려 30센티 정도나 차이가 나는 우리 집에 비해선 다소  낯선 광경이었고, 철없는 나는 목사님과 그 부인 뒤에서 송아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너네 아빠랑 엄마 누가 더 커?"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너네 아빠가 더 작아 보여." (그때의 원죄 때문일까? 키 작은 남편과 키 큰 여자인 나는 이 같은 딸들의 질문에 자주 시달리고 있다.)


나도 그 무렵엔 송아네 교회의 여름캠프에 참여해서 성경말씀을 듣기도 했었는데, 그때 어떤 형이상적이고 신비로운 세계에 서서히 눈을 뜬 계기가 됐던 거 같다. "진짜 있었던 일인 거 맞을까?",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면서 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거야?"라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때. 교회 선생님께 성경 말씀을 주워들으면서 내 가슴속에 정신적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어서 멍 때리거나 공상하는 걸로 일상을 채우던 내게 하나님의 존재는 공상의 새로운 소재였다. 당시 일에 지치고 삶이 고단한 엄마는 할머니가 불교도인 걸 저버린 채 교회에 다녔다. (딸의 친구 아빠가 목사님이어서였는지, 딸이 다니는 유치원이 기독교 계열이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엄마가 성경책을 펼치고, 잠 잘 때마다 기도를 해줄 때는 정신적 아늑함을 느꼈었다. 그때부터였다. 마음이 힘들 땐 안식처처럼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말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렸을 적 지하방에서 하루종일 재봉일을 하는 엄마와 나이가 70도 넘은 늙은 할머니는 어린 딸들에게 세심한 육아를 하진 못했다. 나는 가끔 배가 아파 징징 거릴 때 나를 꼭 안아주거나 심심해할 때 나를 안고 낮잠을 재워주던 할머니의 품이 주는 온기 정도에 만족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계몽사 출판사 직원에게 영업을 당한 엄마가 박스째로 산 책들을 장롱 위에 옮겨두고 책을 읽어줄 겨를 없이 하루종일 재봉질을 하는 게 불만이긴 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친구들과 흥미로운 바깥세상이 내 곁을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네에 가끔 오던 말놀이차, 뻥튀기 기계, 소독약차, 놀이터 한 구석의 달고나 뽑기, 모래놀이, 벽돌과 나뭇잎들을 찧어서 하는 소꿉놀이는 그 시절을 꽉 채운 즐거움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은 서로 섞여 담장벽을 오르면 닿는 장미덩굴에 있는 가시를 코에 붙여 코뿔소 놀이를 했다. 그러다 가시에 찔리거나 담장벽을 오르다가 떨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했다. 그래도 울다가 금방 일어나 다시 가고 싶은 길을 걸었다. 겁도 없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여기저기를 잘도 돌아다녔다. 꽤 먼 길을 갔다가 길을 잃어버릴뻔한 적도 많았고,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는 즐거워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몰라 난감했었던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찰거머리 같은 동생을 놓고 다니다 잃어버려서 속을 태우기도 했었다. 그러고 나서 어찌어찌해서 겨우 집을 찾아왔을 때의 안도감과 성취감이란...

 

유년기 때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장면을 뽑으라면 아마도 그렇게 우리가 모험을 하면서 도달했던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보았던 것일 것이다. 지하방에 살던 나는 아파트에 대한 환상이나 동경 내지 선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아파트의 이름은 무지개 아파트였다. 무지개 아파트로의 첫 모험에 성공한 우리는 자주 그곳을 찾았다. 그곳의 하이라이트는 도로를 향해 계단이 나 있는 곳으로 시야가 뻥 뚫려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그 시야에 거짓말처럼 들어온 무지개. 아이들은 "무지개 아파트에 정말 무지개가 떴다!"라면서 좋아서 뛰어다녔다. 그 후로도 나는 무지개 아파트의 무지개가 주는 희망과 아름다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장면은 가끔 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삶에 지친 어느 날 불현듯 상징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나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음을 알고는 오랜 상실감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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