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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Apr 10. 2023

만약 이어폰 너머에 밥 딜런이 없다면...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르길 바라면서 이어폰을 꼽던 여느 쉬는 시간처럼 나는 가로등에 기대어 어느새 이어폰을 끼고 밥 딜런의 곡을 재생하고 있었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바람만이 알 수도."


"숨고 싶은거니?"

갑작스러운 음성에 놀라서 다리가 비틀거렸다. 아까의 급작스러운 사건 이후로 감쪽같이 잊고 있었던 목소리였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네. 아무도 절 몰랐으면 좋겠어요. 성가시달까? 사실... 피곤해지고 상처받게 될 것 같아요. 전 조용하고 싶어요.

"숨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야. 나도 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내 존재는 숨겨지지가 않더라고... 나란 사람은 음악을 통해서라도 소통해야 했어. 그러니까 숨는 건 숨지 않는 것보다 힘들더라고. "

"네... 사실 힘들어요. 저에 대해 꼭꼭 숨기고 산다는 게.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주사와 폭력이 있는 아빠,  주책맞은 엄마가 아이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런 이유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그 사실을 저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네 존재를 입방아질 하는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그래도 알려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알려진다해도 너는 자연스러웠으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길 바란다."


저 멀리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나는 속에서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이어폰을 뺐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무너지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아빠가 차라리 경찰서에서 오래 있기를 바라며 버스에 올랐다.


경찰서에서 피해자와의 합의에 실패한 엄마의 푸념을 밤늦도록 조용히 듣다가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엄마는 아빠가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합의는 무슨!"


잠이 들지 않자 나는 이내 잠자는 걸 포기해버렸다. 책상 위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백석 평전이 놓여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시보다 마음에 들어온 건 조강지처를 두고 유학길에 오른 그의 행보였다. 카사노바 같은 그의 행동이 왜 이리도 설득력있게 다가오는지... 시 구석구석 그의 외로움이 절절하게 묻어있는 것만 같다.


나는 새볔 일찍부터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학교는 생각보다 북적였다. 교실에 들어서니 몇몇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웅성댔다. 난 조용한 아이인데, 이런 관심이라니...


그 중 한 명이 내게 왔다.

"야, 내가 웬만하면 신경 끄고 공부나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공부가 안되는 거 있지?어제 너네 아빠 맞지?"

"응???"

"맞잖아. 내가 분명히 그 폭력 아저씨가 너한테 '내 딸 김민진'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 걸? 그리고 그 때 너는 도망쳤고..."

"나... 아닌데..."

"근데 왜 도망쳐? 그리고 너 김민진 맞잖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몇 초간 서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알겠다는 듯이 떠났고, 누군가에게 가서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주변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그의 음악을 재생했다.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요.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어요. 이제 곧 학교 전체에 그 사건이 퍼질 거에요. 전 지금 교실로 갈 수조차 없어요."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밥딜런 아저씨?"

핸드폰 배터리를 보니 0%. '에잇. 하필 지금 꺼져버리다니...'


그때였다.

"난 또 누군가했네."

소파에 누워있던 이재 오빠가 부스스 일어났다.

"여기에서 잤어요?"

"응"

"..."

"나 가끔 여기서 자. 독서실보다 여기가 편해."


10.9.8.7.6.5.4.3.2.1

세상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10초였다.


침묵을 깨고 이재 오빠가 물었다.

"근데... 무슨 사건?"

"아... 곧 알게 되실 수도 있어요."

"아.. 그래. 아, 나 근데 너한테 그 말한 건 아무한테도 안 말했다. (미소) 아마 그 사실을 전교생 중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선예한테도요?"

"... 너희 친한 줄 알았는데... 하긴, 여자애들 관계는 알 수가 없다니까."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사귄다고? 이재랑? 하하"

"..."


그때 종이 울렸다.

"수업은 들어야하지 않겠어?"

내가 머뭇거리자 이재 오빠가 내 어깨를 툭툭쳤다.

"괜찮아, 자연스러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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