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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Jun 20. 2023

[인생의 신맛] 여름 철학 : 땡볕과 레몬수



[인생의 신맛]

여름 철학 : 땡볕과 레몬수






겨울엔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 장갑 등으로 몸이 둔해지고 무거웠다면, 여름은 여름 나름대로 나를 구속하는 것들이 많다. 양산과 손풍기, 선글라스가 들어있는 케이스와 생수병, 우산까지. 운전면허 없는 집순이는 여름 외출 시 평소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몸뚱이만으로도 버거운 법인데 챙겨야 할 것도 가지가지. 인생은 팔랑거리는 체크리스트 메모지처럼 내 이마에 붙어서는 짊어져야 할 것들의 목록을 늘린다. 하나하나 신경 쓰느라 마음의 초점을 사팔눈으로 만든다. 바람 한 번이면 엎어질 그 홑겹의 리스트를, 부동의 바위마냥 거슬리게 만드는 게 더위고.


그럼에도 신경질은 욕 한 번, 차가운 음료 한 잔이면 수습된다. 연인과 연애를 시작한 계절도 여름, 빈티지 반팔티를 마음껏 입을 수 있는 계절도 여름, 사랑하는 복숭아와 능소화의 계절도 여름, 내 부모의 생일도 여름이라서, 이 계절은 내게 '싫어도 좋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은 의미가 되었다. 실제로 '좋다, 좋다' 말하다 보니 여름에 대한 애정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 빛, 선크림을 안 발랐다간 피부 껍질이 하얗게 벗겨질 정도로 살벌한 그 빛이 날 더 철학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초점이 어긋난 마음의 눈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이 계절은 다른 계절보다 더 큰 에너지를 쓰도록 한다. 음식을 쉽게 상하게 하고, 기르는 식물을 예민하게 하고, 숙면을 방해하고, 배탈이 잘 나도록 하고, 날벌레가 꼬이게 만들고, 피부를 민감하게 한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제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다운그레이드되는 상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양산이 만드는 그늘을 밟고 나아간다. 이대로 내 땀에 수장될 수는 없지.


나가이 레이는 『물속의 철학자들 -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P. 98 

철학 대화는 돌봄이다. 철학 대화로 치유된다는 뜻은 아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돌봄이라 한 것이다. 철학은 지(知)를 돌본다. 진리를 돌본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듣는 나 자신을 돌본다. 입장이 변하는 것을 겁내는 나를 돌본다. 당신의 생각을 돌본다.


P. 135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철학을 시작하기보다 '무언가에 의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일상은 철학의 기폭제로 가득하다.



여름도 그렇다. 나를 끊임없이 돌보게 만든다. 내가 형편없어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고, 내 시야 안에 들어온 사람과 음식과 생명체를 신경 쓰도록 한다. 손차양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기폭제' 같은 빛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삶이 벌어지는 현장'을 돌본다. 이를테면, 냉장 보관해야 하는 음식을 신중하게 확인하고, 식물이 시들하진 않은가 보고, 시어서커 이불 따위를 검색해 보고, 배는 꼭 따뜻하게 덮고 자고, 욕실 하수구와 싱크대 청소를 부지런히 하고, 마스크팩을 더 자주 해주는 것부터 폭염과 폭우에 쓰러지는 이웃들의 이야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까지. 보고 또 보고, 마음의 눈까지 부릅떠 보려 한다.


언젠가 한 카페에서 얼음과 레몬청이 들어간 음료를 흡입했는데, 한참이 지나 빨대 끝에 설탕이 굳어 매달려 있는 것을 봤다. 친구와 수다 떠는 사이에 그렇게 된 모양이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남은 소금덩어리 같았다. 새콤한 액체는 진작 바닥 났지만, 땀방울처럼 맺힌 그것이 한바탕의 시간을 증명해 줬다. 여름의 땡볕이 만든 일이다. 시원한 가게를 찾아 들어가도록 유인하고, 레몬 맛 음료를 들이켜게 하고, 생기를 되찾아 친구에게 몸을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말하도록 하고, 말이 고갈되자 빈 잔과 널브러진 빨대를 보게 했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의 시간은 이대로 녹아 사라져 버리나 싶다가도, 설탕이 들어간 레몬수 한 잔으로 다시 짜 맞춰진다. 햇빛이 투과된 글라스가 생명수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찬란한 유리 벽에 심장처럼 끈질기게 붙어 있는 레몬 슬라이스 한 장.


싫어도, 좋은 기분으로 끝나면 아무렴 좋은 날이다. 여름엔 그것만 기억하며 외출한다. 다른 체크리스트는 잠시 깜빡하더라도 말이다.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_

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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