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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May 09. 2024

[제목없는일기] 0. 들어가며


내 일기장은 열세 살을 끝으로 과거에 사장됐다. 부산에서 광주로의 삶, 불구덩이 같던 사춘기의 시작과 함께. 


내가 나에 대해,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가늠하고 오롯한 현재에 머물고자 노력한 나에 대해 말하기를… 그친 것은 아니다. 항상 썼다. 그러나 그렇게 쓴 것은 정말로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토록 썼지만 모든 게 유실되어 버렸다. 나는 그저 쓸 뿐, 간직하지 않았다. 사는 내내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내게 없었을까? 음, 쓰고 싶은 순간만 있을 뿐이었다.


새 메모장이 생길 때마다 새 핸드폰이 생길 때마다 나에겐 ‘거들떠 보지 않을 기록’도 생성되었고, 생김과 동시에 그것들은 목숨을 다했다. 목적 없는 쓰기. 지금 가지고 있는 핸드폰(Galaxy S20)의 첫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20. 10. 28 기록이다.




여기, 
나 혼자 있어
다 끝난 이야기로




시? 나는 이걸로 시를 쓰고 싶었던 걸까? 

이어지는 다음 날 메모는 심지어 언젠가 키우게 될 고양이 이름 후보다. (참고로, 2024년 5월 기준, 단 한 마리도 못 키우고 있다.)




내 고양이 둘   


    천봉/ 만봉  

    비누/ 생강  

    뚜비/ 두밥  

    치앙/ 마이  

    파도/ 민트  

    사루/ 비아  




2021년으로 가볼까. 21년 7월 16일엔 나는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사심 없는 사랑에 실패했다.   

- 내 시에 자긍심을 갖는 것에 실패했다.  

- 직관만을 믿는 실수를 반복하느라 성실한 추리에 실패했다.  

- 단념에 실패했다.  

- 차질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그 ‘차질’이다.  



이상한 기록들이다. 일단, 메모장 앱이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날짜를 제외하면 어떠한 유의미한 정보도 없다. 제목도, 날씨도. 심지어 구구절절하지도 않다. 나는 이 기록을 ‘무엇으로도’ 인지해본 적이 없다. 그저 썼으니까.


이것은… 일기? 

메모? 

배설? 

기분? 

영감? 

물론, 여느 일기 엇비슷한 기록도 있다. 22년 9월 20일자 글이다. (장문 주의)




태어남 자체가 실패라고 생각한다. 패자부활전 따윈 없는 완벽한 실패. 무를 수 없는 경기의 결과. 내가 이겼다면, 태어나지 않았겠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온전한 평화를 누렸겠지. 우주의 성운이나 겨울 햇살보다 희미한 채로. 아니, 희미함보다 더 얇은 '부재'의 앙상한 뼈마디인 채로. 


이 생각이 부끄럽고 죄스러울 때가 있었다. 나를 낳아준, 길러준, 사랑해준, 의지해준 이들에게 지는 빚 같아서. 그래서 자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높다. 우뚝 솟은 푸른 나무만 봐도, 넘어져 우는 아이만 봐도 그랬다. 나를 둘러싼 우주는 완벽하다. 견고하고, 의미심장하다. 나만 빼고. 그 찬란함 앞에서 어째서 누추함은 매번 덩치가 큰 것인지. 숨을 길이 없다. 나를 놀리기로 작정한 연극 무대처럼. 


비탈길로 내려가 숨을 고르다 그냥 뚜벅뚜벅 언덕의 둘레를 따라 걷는, 낙오된 마라톤 주자가 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루저의 어깨,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다리, 도무지 모든 게 적응되지 않는다는 눈빛. 


(중략)


나는 실패자. 죽는 순간까지 실패자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내가 실패자라는 명징한 사실 때문에 깊게 안도하기도 한다. 이 삶과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올라설 높은 곳이 없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내 자리는 딱 여기다.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끝나는 삶. 매일 눈 뜨고, 물을 삼키고, 밥을 먹고, 남을 조금 미워하고, 나를 많이 경멸하고, 모두에게 미안했다가, 사랑에 의지하고, 사랑을 멀리하기도 하고. 그것을 글로 쓴다. 숨을 쉬는 행위는 사명감이 필요 없으니, 글도 그런 마음으로 쓴다. 나는 이 좁은 자유를 몹시 부끄러워하면서도 누릴 생각이다.


세상은 깔볼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는 저주하는 마음조차 주지 않는다. 오히려 드물게 동정심을 발휘한다. 그냥 마음대로 살라며, 적당한 가식과 얕은 염려를 담아 토닥여준다. 나는 내 삶도 자주 그렇게 여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태도는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모두가 말하는 인간의 건설적인 의지와 도리보다는, 인간의 무능과 비정함을 설명하는 말들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잘못된 것일까. 그 비정한 언어들이야 말로 나와 같은 체온을 가졌을지도 모르는데.


(중략)


다 아웃사이더의 허세처럼 보이려나. 하지만 이 정도의 허세는 들통나지 않거나 깔볼 가치도 없다. 끝내 혼자 아는 기쁨과 슬픔이니까. 나는 소리를 죽인 채 웃고 우는 법을 안다. 나는 내 실패를 외롭게만 두지 않는다.




너무 길어서 놀랐다면 유감. 이런 글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니 다 안 읽어도 된다. 나도 부끄럽다. 어쨌든,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기장으로부터 독립했으니, 이런 글은 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게… 이상한, 때로는 고약한, 이해할 가치도 없는 어떤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쓰는 사람에게 일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참고로, 2024년 5월 기준, 난 고양이도 없는 주제에 등단도 못 했다. 자의식 과의식. 자격지심.)


일기장 하나 없는 현대인이 어디 나뿐이랴? 그다지 말이 안 될 것도 없는데, 나는 마치 처음으로 콘돔을 구매하는 청년처럼 쭈뼜거리며 약간은 절박하고 부끄럽고 결연한 마음으로 문구류 가게들을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쓸 일기장으로 괜찮은 값비싼 노트를 사보는 것. 아름다운 커버와 눈이 편안한 미색 내지, 가름끈까지 있는 것으로. 


의미 있는 소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말 거라는 내 예감이 적중했으므로. 


그렇다. 나는 일기를 못 쓴다. 불성실해서는 아닌 것 같다. 쓸 내용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노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거나 루틴화에 실패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싫다. 진짜 아니니까. 


내가 일기 불구가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일기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먹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대표로 출전한 일기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던 김해서가, 이런저런 글밥 먹고 살아가는 인간이, 10년 차 시인 지망인이지만 산문집 한 권은 운 좋게 출간한 스펙(?)이 있는 내가 일기를 모르겠다! (제길!)


은은한 조명 아래, 아름다운 자태의 일기장이 안겨준 의문은 다음과 같다.   

  

- 어차피 나만 보고 말 글인데, 비문을 신경 써야 하나?   

- 나를 ‘미미’나 ‘콩벌레’, ‘델피늄’ 같은 아무 말로 지칭하면 웃기려나?  

- 오늘 일기인데, 어제 벌어진 일을 쓰면 그건 어제의 일기인가?  

- 일기가 하루 성과 보고서는 아닐 텐데, 대체 왜 나는 스스로 미숙하고 찌질한 면을 평가하는 일일꼰대가 되어 있는가?  

- 일기는 나의 자서전인가?   

- 수정 불가능한가?   

- 내게 벌어진 팩트 중심으로 써야 하는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 중심으로 써야 하는가?  

- 거짓말을 적으면, 괄호로 거짓말을 표시해야 하나? (이건 거짓말…) 으, 구리다. (이건 사실…)  

- 제목은? 날씨는? 그날 입은 옷은? 그날 들은 노래까지? 대체 얼마나 구체적으로?  

- 변함 없이 벌어지는 것만을 기록해야 하나, 새로 벌어진 일을 기록해야 하나?  



하… 나는 일기를 잘 쓰고 싶은 인간도 아니다. 자격지심에 부들대는 게 지겨워서 ‘일기라도 쓰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했는데, 그뿐이었는데, 일기 속에서 일기가 무엇인지 헤매는 시간만 보내게 된 꼴을 보라. 낭비다. 일기를 쓰려고 앉은 시간은 결국 ‘일기를 안 쓰는 시간’으로 허비되었다. 다시, 나는 써놓고 안 볼 기록에만 매진했다. 두 번은 펼쳐보지 않을 수첩과 메모 앱 속 세상으로. 


그러나 그런 내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준 책을 어느날 만나게 된다. 미셸 트루니에의 『외면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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