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
일상에서 ‘밥’은 먹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만나면 상대에게 “밥 먹었어?”라고 물어보고 헤어질 때는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라고 한다. 꼭 밥을 같이 먹자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마음을 열었거나 열고 싶은 관계에서 오갈 수 있는 인사말이다. 또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나 서로 갈등이 일었을 때 또는 상대방에게 하소연하거나 설득할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밥은 먹고 산다.”는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산다는 말인데 나 같은 1일인 가구들은 어떻게 먹느냐보다 무엇을 먹는지가 더 중요하다. 혼자 살다보면 조리를 하지 요리를 해서 예쁜 그릇에 먹지 않는다. 나는 글쟁이라 주로 집에서 작업하는데 하루 한 끼는 밀가루 음식이 아니라 밥을 먹어줘야 든든하다. 일을 하다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냉장고에서 말라붙은 밑반찬을 꺼내 묵묵히 밥을 먹을 때면 냄비에 제대로 끓인 찌개나 국이 간절하다. 동네 골목에 맛있는 백반집이 있다면 좋으련만 전철역까지 주택들만 길게 이어질 뿐이다. 백반만큼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것 도 없다. 국밥, 설렁탕, 해장국도 든든하지만 정식 개념이 아니다. 식당의 백반은 쌀밥에 국과 가정식 반찬이 세 가지에서 다섯 가지 정도 나오는데 그중에 생선구이가 있으면 좋다. 조기구이는 먹을 게 없고 작은 토막이라도 삼치구이 같은 것이 먹을 게 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로 구성하는 찌개백반의 경우 반찬 가짓수가 적다.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먹고 싶을 때 혼자 가정식 백반을 사먹으면 되지만 먹고 나서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다. 누군가와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먹는 밥은 맛도 더 있고 소화도 잘된다. 우리의 뇌는 편안하게 음식을 씹을 때 스트레스가 풀어지고 마음의 평안을 찾아 주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음식을 먹을 때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볼 때도 분비된다.
마포구 망원동 주택가 빌라에 사는 친구는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집밥을 먹는 파티를 연 적이 있다. 메뉴는 흰 쌀밥에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나물무침, 갈비찜, 김치찌개와 고향에서 가져온 장아찌 종류였다. 친구는 테이블 세팅을 양식처럼 하얀 면 테이블보를 깔고 물잔 와인잔 그리고 초와 꽃으로 장식했다. 긴 일정으로 나간 해외여행 중 찾아간 한식당처럼 반갑고 색다른 분위기였다. 동네 친구들끼리는 서로 정기적으로 집으로 초대해 집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 동네는 1인가구들이 많고 게스트하우스도 많다. 내 친구도 방 세 개짜리 오래된 빌라를 전세로 얻어 수리한 다음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으로 가는 마포구청역 6번 출입구 골목 축대 밑으로 길게 이어진 자전거 거치대가 인상적이었다. 빼곡히 들어찬 자전거가 화단의 넝쿨처럼 생명력이 강해 보였다. 성산로 축대 밑 골목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빌라들이 600미터 가량 이어진다. 붉은 벽돌 마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독특한 색깔의 동네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네 골목에 전국청년들의 교류와 다양한 행사를 위한 공간대관 그리고 네트워크사업을 하는 ‘서울특별시 청년교류공간’이라는 특이한 공간이 있었다.
망원동에 다녀온 후 떠오른 곳이 연희동이다. 연세대학교 과학원 뒷길인 연희10길 골목은 하숙생과 자취생이 많고 젊은 직장인도 많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맛있는 백반집도 있고 동네 분위기가 특이할 것 같았다. 서울의 뒷골목중 작은 공장이 밀집한 곳이나 오랜 세월을 버틴 한옥이 있는 곳이 아닌 주택가는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연세대학교 캠퍼스를 산책하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완만한 내리막길 골목이 좁아 편의점도 작고 커피점도 작다. 분식점보단 중국요리점에 손님이 더 많았다. 날이 저물자 골목은 더 좁아 보였고 작은 간판들이 피어났다. 여성전용 하숙집 건물엔 ‘안심하고 행복한 서대문구 안심길입니다’ 사인물이 부착되어 있고 막다른 길에는 서대문구청관제센터와 연결되는 비상벨도 설치되어 있었다. 원룸과 하숙집 출입문에 거울시트지가 부착되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뒤를 볼 수 있어 위기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점이 특이했다. 맛있는 백반집은 겉으로 봐도 맛의 아우라가 느껴지는데 연희동 하숙 골목에 들어가고 싶은 식당은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자 규모가 커서 백반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맛있는 집밥을 파는 식당이 많이 있었다. 고사리를 품은 불고기가 맛있는 식당, 연잎 쌈밥정식이 맛있는 식당, 날치알쌈이 맛있는 식당 앞을 서성거리다가 칼국수집에 들어갔다. 깔끔한 사골육수에 부드러운 면과 겉절이 김치와 백김치가 조화로운 담백한 맛이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나중에 온 손님에게 칼국수가 먼저 나가서 미안하다며 작은 공기밥을 서비스로 줬다. 먼저 김치와 밥을 먹다가 칼국수를 먹었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남김없이 먹었다. 칼국수백반이었다. 냉면집에서도 공기밥을 팔았으면 좋겠다.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먹고 따뜻한 육수를 마신다면 아주 든든하고 만족스러울 것 같다. ■
토요일 정오까지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케이로부터 아무런 메시가 없었다. 어제 맥줏집에서 내가 또 제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술이 원수다. 새로 담으려면 비워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게 다 길들여진 밥맛 때문이다. 답답해서 식탁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가 똬리를 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속이 쓰려 냉장고를 열었지만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제이가 손질해서 비닐 팩에 밀봉한 채소는 죽이 된 반면 겉포장을 열어둔 치즈는 말라붙어 있었다. 치즈 한 장을 꺼내 딱딱하게 말라붙은 귀퉁이를 떼어내고 입에 넣었다.
어제저녁 외로움을 달래려 케이를 만났다. 그는 주문한 삼겹살 2인분을 모두 불판에 얹었다. 그러고는 적당히 익은 삼겹살을 정신없이 집어 먹었다. 나는 몇 점 집어 먹지도 못했는데 더는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주를 삼키고 입술 안쪽을 혀로 한 번 훑고 나서 배가 부르다고 말했다. 잠시 후 불판에 남은 몇 조각의 삼겹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케이가 밥을 볶아 먹자고 했다. 케이는 불판에 밥 한 공기를 쏟아 부었다. 푹 익은 김치를 잘게 썰어 넣었다. 달고 매운 양념을 넣고 고소한 참기름을 뿌렸다. 날계란도 하나 풀었다. 밥을 볶은 다음 김 가루를 뿌렸다. 볶음밥이 돼지기름 가득한 불판에 눌어붙기를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소주로 건배를 했다. 차가운 소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감칠맛이었다. 몸이 바로 뜨거워졌다. 소주가 계속 들어갔다. 볶음밥 덕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맥줏집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맥줏집에서 나와 케이와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거리는 복잡하고 환했다. 식당과 술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거리가 어지럽게 취해 있었다. 케이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사라졌다.
주말, 늦잠을 자고 일어날 무렵 달큰한 양념 냄새를 피우며 조리를 하던 제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부재가 한 끼의 허기만큼 또렷하게 각인되는 경험이다. 제이는 음식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얀 접시는 캔버스와 같았다. 시금치와 당근같이 색감이 뚜렷한 채소를 퓌레로 만들어 손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대부분 손가락 터치가 살아있는 추상화였고 고흐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풍경화도 있었다.
제이가 사라지자 천장에서 물소리가 났고, 배수구에서 악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수관 어딘가에 금이 가서 폐수가 건물 틈으로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내 몸도 낡아서 금이 간 하수관처럼 서서히 부식되는 듯했다. 악취를 희석하려고 담배를 또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가 창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 안을 맴돌았다. 내 방의 악취를 없애주는 탈취제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다.
제이가 처음 해준 요리는 튀김이었다. 그 튀김을 먹은 다음부터 고소한 향기를 맡으면 제이가 떠올랐다. 제이가 만든 튀김은 식어도 바삭한 맛이 오래갔다. 튀김옷을 반죽할 때 녹말가루와 베이킹파우더를 넣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비결은 기름의 온도에 있었다. 바삭한 튀김을 튀기려면 기름의 온도 조절이 중요하다. 제이는 튀기는 도중 화력 조절을 잘했다. 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항상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서 크게 다투거나 언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제이가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나자 방에서 조금씩 풍기던 제이의 체취가 사라졌다. 처음엔 제이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제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제이가 나를 떠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제이가 해주는 밥을 맛있게 먹기만 해서일까.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밥을 맛있게 먹었기 때문에 자신의 요리 실력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숙취를 동반한 허기에 떠오른 것은 쌀밥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솥밥 말이다. 밥을 제대로 먹으려면 전기밥솥에 하지 말고 직접 돌솥에 정성껏 지어야 한다. 배가 많이 고플 땐 제이가 자신의 집에서 해주었던 뜨겁고 차진 밥이 떠올랐다. 제이는 고향에서 가져온 갓 찧은 쌀을 찬물로 씻으면서 쌀알이 깨지지 않게 빠르고 부드럽게 헹궈야 한다고 말했다. 쌀을 씻은 다음엔 쌀알의 촉촉함을 살리고 쌀을 불리는 과정을 거쳐 밥을 지었다. 하얀 거품이 돌솥 뚜껑을 들썩이며 끓어오를 때 제이가 밥 냄새를 깊이 들이마셔 보라고 했다. 온몸이 따뜻해지는 구수한 냄새였다. 제이는 뜸을 들인 다음 돌솥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뒤집으며 밥알과 밥알 사이의 수증기를 빼냈다. 그런 다음 밥알들이 호흡하면서 편안하게 자리 잡기를 기다렸다가 주걱으로 딱 한 공기에 가득 찰 만큼을 퍼 담아 밥상으로 가져왔다. 윤기가 흐르는 밥알이 빛을 반사했다. 밥알과 밥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제이는 밥을 한 수저 퍼 올린 다음 알맞게 숙성된 김치를 길게 찢어 김치 소가 떨어지지 않게 밥 위에 원을 그리며 살포시 얹어 먹여주었다. 밥이 많아 한 입에 다 털어 넣기가 어려워 조금씩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뜨거운 김을 빼냈다. 입 안에 얼얼하고 따뜻한 여운과 맑은 침이 고이면서 김치 씹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집에는 쌀도 돌솥도 없었다. 만사 귀찮아 졌다. 생수를 들이켜고 침대에 쓰러졌다. 다시 눈을 뜨자 오후 6시였다. 퀴퀴한 냄새가 나서 일어나서 창을 전부 열었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고 나서 간단하게 화장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곳엔 밥맛없는 사람도 없고 밥맛 있는 사람도 없다. 반찬통을 들고 우리 동네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주말 밥상’ 모임의 드레스 코드는 추리닝이다. 주말 약속이 없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모임의 주최자이자 오늘의 주방장은 다세대주택을 전세 내서 에어비엔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여사님이다. 오늘의 메뉴는 가정식 백반이다.
게스트하우스에 입장하자 웬걸 모두 추리닝을 입었지만 한껏 멋을 부린 티가 역력했다. 신입회원이 있었다. 하얀 면 티셔츠 하나 걸쳤는데도 세련되고 상큼해 보이는 남자 대학생이었다. 그에겐 고소한 튀김냄새가 났다. 회원들은 4인용 식탁을 두 개를 이어 붙인 밥상에 둘러앉았다. 압력밥솥으로 한 하얀 쌀밥에 홍합 미역국, 계란말이, 총각김치, 가자미구이 그리고 특별메뉴인 잡채가 차려졌다. 회원들이 식사하는 동안 주방장은 회원들이 가져온 반찬통에 잡채를 담았다. 남자 대학생이 반주로 소주 한 잔씩만 하자며 잔을 돌리려 했지만 모두 사양했다. 나만 잔을 받았다. 소주가 들어가자 속이 뒤집어지면서 어제 먹은 볶음밥이 떠올랐다. 미역국으로 겨우 생목을 눌렀다. 남자 대학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웃었다. 그는 이탈리아 요리를 잘한다고 했다. 다음엔 자신이 주방장이 되어 단백하고 느끼하지 않은 봉골레 스파게티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그를 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엘이 돌솥밥을 몰아낼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