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eBook 10minutes 초단편 오디오북
극장이 새 단장을 끝내고 다시 오픈하는 날이다. 나는 아직 포장 비닐에 둘러싸여 있다. 제일 앞자리부터 하나씩 비닐을 벗겨 내는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보인다. 또 그 옆에 온종일 오픈 준비를 하고 청소를 마친 여학생이 보인다. 둘은 함께 아르바이트하며 사랑을 키웠다. 젊은 연인은 극장의 조명이 전부 꺼지자 내 위에 앉아 사랑을 시작한다.
빨간 가죽을 찢어버리고 허공으로 날아가고 싶다.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수록 무력감에 빠진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지나갈 때 살려달라고, 나는 원래 사람이었다고, 나를 좀 어떻게 해달라고 외치지만, 아줌마는 걸레질만 한다. 히터를 점검하는지 천장에서 뜨거운 바람이 계속 나온다. 온도가 올라가자 내 몸에서 플라스틱 냄새와 가죽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조명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면서 내 몸을 비춘다. 먼지들이 조명불빛으로 모여들어 춤을 춘다. 나는 뜨거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걸레가 다시 한 번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히터가 약해지고 조명이 어두워진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첫 관객은 여자다. 여자는 팝콘을 들고 나에게 온다. 여자의 부드러운 물살이 내 몸을 누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여자의 머리는 사내처럼 짧다. 기름에 전 머리는 자고 방금 일어난 듯 달라붙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음료 서비스가 시작된다. 여자 앞에 놓인 탁자에 빨간 와인이 놓인다. 시중드는 직원은 여자에게 와인 한잔을 따르고 사라진다. 영화가 시작되자 여자는 조개처럼 꼭 다문 엉덩이를 움직이며 자리를 잡는다. 여자의 탐스러운 살이 나를 계속 누른다. 여자와 더 밀착하고 싶어 몸을 부풀린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위험에 처하자 여자는 슬리퍼를 벗고 다리를 오므린다. 발바닥의 축축한 땀이 느껴진다. 여자는 영화를 보다가 훌쩍거린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맑은 감성이 빨간 가죽을 파고든다. 여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냅킨을 다 써버린 여자는 눈물 닦은 손을 엉덩이 밑으로 넣어서 문지른다. 눌린 스펀지가 가쁜 숨을 내쉰다.
영화 속에서 먹구름이 가득 차고 장대비가 퍼붓는 소리가 난다. 그날 상영관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터졌을 때를 기억한다. 영화 속 대지에 흙탕물이 튀어 오르고 숲에서는 물안개가 연기처럼 피어난다. 상영관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유독가스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비상구로 뛰어가기엔 이미 늦었다. 영화 속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린다. 극장 의자의 스펀지가 녹으면서 불이 옮겨 붙었다. 내 영혼이 극장 의자로 들어간 건 화재 때문이었다. 육체가 극장 의자에 눌어붙는 순간 영혼이 빨려 들어갔다. 극장 주인은 불탄 극장 의자의 뼈대를 재활용했다. 불에 타서 시커멓게 눌어붙은 시트를 벗겨내고 빨간 가죽을 덧씌우자 내 영혼은 그 안에 봉인되었다.
화면이 밝아진다. 객석의 의자는 전부 빨간색이다. 관객은 빨간 의자 안에 여자의 엉덩이를 탐하는 유령이 사는 것을 모를 것이다. 바닥의 빨간 카펫에서, 화면이 활활 타오르는 장면에서, 관객의 얼굴이 붉어지는 장면까지 극장 안은 온통 빨강의 물결이다. 의자가 되어서야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찰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이었을 때 나는 사유하지 않았다. 영혼을 버리고 미디어의 쾌락만 꾸역꾸역 받아먹었다. 지금 누리는 훔쳐보기의 쾌락은 지난날 영혼을 버리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하늘의 응징일 것이다. 관객의 얼굴이 전부 빨갛게 달아오르자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자막의 끝이 보인다. 천장 조명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카펫의 빨간색이 점점 밝아진다. 벽을 따라 흐르는 라인에 불이 들어온다. 내 몸이 식는 게 싫어서 여자를 붙잡으려 하지만 여자는 잡히지 않는다.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내 영혼이 의자에 들어간 그 날처럼, 상영관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힘이 날 것 같다. 빨간 가죽을 찢어버리고 날아가는 상상을 한다. 여자는 관객이 모두 나간 다음 일어난다. 나도 같이 따라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날 내가 빠져나갔어야 했을 비상구로 걸어 내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