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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Nov 17. 2020

5월의 조각들

일기 아닌 일기

0501
시간을 가지자. 말라비틀어진 청보랏빛의 팬지 꽃이 보이니? 그 말간 찬란함도 시간 앞에서는 고여있지 못하는 거야.

0502
가끔 읽었을 때 숨 막히는 아름다운 글들이 있다. 내가 쓰지 못하지만 간절히 읽고 싶었던 그런 글들. 그런 글들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부서지면서도 행복하다.

0503
이 하루를 통과하기 위해서 나는 속이 쓰리지 않게 옆으로 누워, 그러나 참담하게 피를 토하고 쓰러진 명화 속의 한 사람처럼.

0504
단어의 나열들과, 맞춤법과, 이제까지 배워왔던 나의 언어들이 서서히 잊혀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서서히 멍청해지고 있는 걸까-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는 중독자처럼 활자를 읽어내려야 한다고.

0506
나의 가까운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을 무슨 병이라고 부르나요? 병명을 묻는다. 증상은 나와 친밀했던 그 전부가 싫어져 심사가 뒤틀려버리는 거예요. 내가 미친 걸까? 아니,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0507
먼지를 품은 우주 같은 나의 검은 커튼이 깊은 밤 속에서 파르르 전율했다.

0508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붓 끝의 한 점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반짝이는 돌가루를 쫓는 종이에 머물러 숨을 쉬고 싶어. 빛나고 찬란한 것들을 쫓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0509
약이 없는 처방전을 받았어요. 봉투에는 모가지가 댕강 잘린 작약 꽃봉오리들이 한아름 들어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움의 냄새가 가득했어요.

0510
나에게 끝끝내 고르라고 재촉하는 영악한 팔레트.

0511
바닥에 가득 찬 풍선을 바늘로 터뜨리고 싶어. 고성방가를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다가 울며 잠들고 싶어.

0512
태워 없어질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 쓰이지 않은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창의적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0513
Congratulations
아무것도 끝난 게 없지만 끝났어, 축하해 라고
숨죽인 마음으로, 불균형적인 안식처로, 자각하지 못하는 운명으로.

0514
열기구처럼 붕 뜨고 싶다. 한 점의 걱정도, 조바심도 없는 기분으로 뜨거운 열기를 타고 한없이 높은 곳으로.

0515
내 손가락들이 모래알들과 함께 쓸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물아래에서 오로라빛의 한숨과, 녹아 없어진 엷은 봄눈의 자욱들이 혈관 속에 스며들어 처연한 뺨에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아주어.

0516
물과 하늘이 오선지와 건반처럼, 건물은 음계가 되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기이한 붉은빛을 내며 그렇게 이 세상에 알 수 없는 노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0517
물속에서도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아가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쓰다듬으면 고결하고 조악한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아 나에게는 자꾸 귓바퀴를 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0518
향을 피우고 자욱해졌을 때 숨을 깊이 들이쉬어봐. 가지런히 놓인 네 탁자의 물건들을 모두 진창에 처넣고 싶은 기분이 들어.

0519
그래, 그 아이는 흰 천을 뒤집어쓴 촛불 같았어.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말이야. 장롱에서 나오지 말아주었으면 했던 그게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지. 그러니 재빨리 그것은 난간으로 올라가버리던 걸. 그래서 놔주었어, 그리고 나는 그 애의 불온한 자살을 목격했지. 죽었을까? 대답해봐, 캐스퍼.

0520
세상이 여름 정원이 되었다. 하지만 내 몫의 따스함은 한 줌도 없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0521
반짝거리는 옛날 것들이 좋다. 조그마한 싸구려 큐빅들, 햇빛에 대면 빛이 나는 조악한 사탕껍질, 판박이 같은 인쇄물과 낙서들. 그 자체로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것들. 오래되어 빛나는 그런 것들.

0522
행복한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내 소파를 홍차에 풍덩, 하고 빠트린다. 얘, 잘 구워진 피아노 건반 모양의 쿠키도 먹을래?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이 불어와 내 방 벽에 붙은 종이를 두드리고 간다.

0523
내일의 생기와 오늘의 버석한 그을음에 동시에 어지러워요
피그말리온의 입맞춤을 나에게 주세요

0524
커다란 가오리 연이 팔을 힘껏 펴고 날아오른다
돌아갈 수 없는 가파른 언덕을
그것은 날아오르는 모양새가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환영을 지니며
고이는 눈물에 찢기며
이내 빗물에 젖어 추락하는 가여운 새 처럼

0525
이상한 날들이 계속되고
갈피가 없는 책들은 마지막 장을 모르고 팔랑이며 계속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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