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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Feb 09. 2020

어느 날 갑자기, 일요일의 맨해튼

200119

미국에 온 지 처음으로 밤이 길었다. 도착하자마자 방에서 쥐가 나와서 계속 불을 켜고 자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세 시간, 네 시간 단위로 계속 잠에서 깼다. 시차 적응은 아닌데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인지 푹 자지 못했다. 말 그대로 피로 누적이었다. 김종대 때문에 화가 나서 감정 소모하느라 입맛이 없었는데 며칠 지나니까 다시 원래의 리듬을 찾았다. 역시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 하지만 잊고 있다가도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피자가 먹고 싶어서 오픈할 때까지 기다렸다. 에피스 키친에서 팬케이크를 먹을까 하다가, 피자로 메뉴를 급하게 변경했다. 리코타 피자와 치즈 피자, 두 조각이 6.5불이었다. 뉴욕의 물가란. 그리고 고구마 치즈 크러스트가 없다니,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현정이에게 갑자기 카톡으로 연락이 와서 급하게 외출을 결정했다. 예전에는 어디 갈지 정하라고 하는 편이었는데 사진 찍는 데에 취미를 붙인 이후로 내가 선택지를 몇 개 정해서 직접 고르라고 주는 편인데, 다들 그 편을 좋아하는 듯 싶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일석이조. 인테리어가 예쁜 모마 건물 6층에 있는 테라스 카페에 가려고 가는 와중에 찍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지만 움직일 수 없는 동상의 기분은 어떨까?

인스타그램 사진 찍기에 취미를 붙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떤 느낌으로 가지? 하고 갈팡질팡하며 이 느낌 저 느낌 보정하다가 2020년 신년 맞이 인스타 콘셉트를 바꿀까 해서 피드를 전부 지웠다. 사람들이 분위기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낡아서 매일 수리하는 빈티지한 뉴욕에 맞추어 노랗고 빈티지한 감성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RGB 인간이라 하얗고 밝은 사진, 쨍한 채도를 좋아하는데 뉴욕은 맥시멀 한 도시라서 도통 미니멀리즘이 안 된다. 칠이 벗겨진 벽이나 간판으로 가득해 흰 배경으로 찍을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그래도 자연광은 어디에나 공평하니까.

현정이가 버스를 타고 오느라 내가 먼저 도착해서 모마 스토어도 둘러봤다. 모마에서 파는 저 색감이 예쁜 디자인 자기들이 마음에 드는데 나는 미국의 2등 시민이기도 하고 미래의 외노자이기 때문에 저런 것들을 사도 이사 다닐 때는 짐이 될 뿐이다. 유목민에게 저런 물건들은 사치일 뿐.



테라스 카페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는데 티켓을 발권해야 한다고 해서 학생증으로 바로 발급함. 정작 모마는 하나도 둘러보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모네의 수련을 보고 또 감탄했다.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실물이 가장 압도적인 것은 모네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크기라든지, 색감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남다르다. 평일 아침에 방문해서 다시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20분 정도의 웨이팅이 있다길래 이름은 올려두었지만 금방 포기해버렸다. 날이 선선해질 때 테라스에 앉으면 좋을 듯하지만 오늘은 너무 춥기도 하고, 테라스도 막혀있어서 알아봤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이키 스토어에 들르려고 지나가는 길에 찍은 빛이 신기하게 비친 대성당. 사진을 보정할 때마다 생각하지만 자연광은 항상 옳다. 실내조명에서는 절대 저런 느낌이 나오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서 항상 느끼는 자연의 신비.

롯데 호텔 1층에 있는 폼므 팔레. 뜻을 찾아보니 폼므는 사과, 팔레는 댄스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과 댄스홀이라니, 잘은 이해가 안 가지만 예쁜 단어를 조합한 걸까? 레몬 타르트와 치즈케이크 중 무엇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산딸기가 올려진 예쁜 치즈케이크로 선택. 봄이 되어가니 확실히 계절메뉴라 카페에 딸기 메뉴들이 많다. 가을에는 카페가 합심한 듯 무화과가 가득했는데. 꾸덕꾸덕하고 진한 맛의 치즈 케이크여서 아메리카노와 잘 어울렸다. 현정이가 시킨 피스타치오 다쿠아즈도 크림이 진했다. 작은 치즈케이크가 8불이 넘는 사악한 가격에 비해 의외로 아메리카노는 2.5불이었는데 원두가 나쁘지 않았는지 맛있었다. 단점은 호텔 로비에 앉아서 먹어야 했다는 점 정도. 하지만 의자가 푹신하니 좋았고 디저트도 내 입맛에는 맞아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키노쿠니야 서점에 오래간만에 들렀다. 키노쿠니야는 일본 서점 체인으로 뉴욕에는 브라이언트 파크 쪽에 있는 이 지점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디자인 서적이나 잡지, 무크지를 보러 가는데 이 책은 항상 있는 책 중에 가장 탐이 난다. 나이키 신발이 쭉 나열되어 있는 책인데 디자인도 예쁘고 깔끔하다. 안 그래도 오늘 나이키 매장에서 본 에어맥스 97 올검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조거 팬츠에 신으면 예쁠 것 같았는데 170불이라 고민하게 만든다. 이러다가 원래 계획했던 Vista Lite 시리즈를 사게 될 것 같다.

오늘도 예쁘게 빛나는 크라이슬러 빌딩. 그랜드 센트럴 역을 좋아해서 지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는데, 건물 때문인지 여기만 유럽 느낌이 난다. 유럽을 안 가봤다는 게 함정. 밑에는 나무가 거꾸로 매달려있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현정이랑 저게 뭐냐면서 막 찍어댔다.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기회가 되면 저 나무를 자세히 보러 들어가 봐야겠다.

돈가스를 좋아하는 내가 그나마 맨해튼에서 돈가스를 먹을 수 있는 전문점은 카츠 하마와 이곳 마츠 노야다. 카츠 하마보다는 낫지만 바삭거리는 맛이 부족하다. 생각해보니 뉴욕에서 텐동은 먹어본 적이 없어서 뉴욕의 일식 튀김들을 어느 정도로 튀기는지 잘 모르겠다. 맨 처음에 스몰 플레이트로 새우 슈마이가 나왔는데, 알고 보니 서버의 잘못으로 나온 메뉴여서 당황했다. 너무 작아서 애피타이저인 줄 알고 세트인가 보다! 하고 먹었는데 나중에 영수증에 청구가 되어있었다. 물어보았더니 '잘못 나온 건데 그래도 너네가 다 먹었으니 돈을 내야 한다'라고 해서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여기를 처음 온 사람들이고, 애피타이저인 줄 알았으며 그것은 서버 실수인데 우리가 왜 지불해야 하냐고 말했더니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럼 내고 싶으면 내라고 해서 내지 않았다. 아마 재방문은 거의 하지 않을 듯싶다.

베이지색 원피스인데 어째서 인디핑크 톤으로 나온 걸까?

이제 곧 떠나게 될 기숙사. 살기에 나쁘지는 않았지만 쥐와 바퀴벌레의 출현이 앞으로도 미지수인 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으니 짧은 유목민 생활을 하는 수밖에. 쥐가 나와도 종이 끈끈이나 붙여주면서 로비는 전부 새로 수리한 게 괘씸하다.

일요일의 갑작스러운 만남 치고는 아주 알차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날이 아직은 추워서 잘 돌아다니기도 어렵고, 이제 본격적인 개강이라서 아마 요 며칠간 돌아다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까? 미래의 나에게 힘내라고 전하며 마무리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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