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달보름 Mar 08. 2023

진작 병원에 갈 걸 그랬다, 술과의 이별 1일 차

2023년 3월 6일 

오늘은 첫째가 학교 가는 날이라고 (1학년이라 매우 설레는 요즘) 아침 일찍이 깨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혹시 남아있을 알코올 냄새를 아침부터 빼 내야 그나마 죄책감이 덜 하니까. 거실 문을 열고 나가니 집안이 깨끗하다. 언젠가부터 술에 취하면 집을 정리하는 술버릇이 생겼다. 화장실에 가서는 켜켜이 쌓인 시꺼먼 곰팡이 점을 락스물로 불려 긁어 없애고, 건조기에서 두세 번 꺼내 쌓여 놓은 빨래는 각을 잡아 정리해서 서랍장에 착착 넣어 둔다. 싱크대에 남아 있는 술잔과 안주를 덜어먹은 그릇은 싹싹 닦아 식기 건조기에 올려 두고 혹시 남아있을 물기를 행주로 닦아낸 뒤 행주는 락스물에 담근다. 



그 뒤에 샤워기를 머리 위에 올려두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박박 씻어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느라 (혹은 뒤틀린 골반으로 엉망이 된 발에) 박혀버린 굳은살도 살살 제거하고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봤던 괴랄한 취미인 내성발톱 제거 영상에서 마무리로 봤던 발톱을 칫솔질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모든 프로세스는 술을 마시고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와 같은 행위일 것이다.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깨끗할 거면 술을 끊지 말아야 하나?' 


할 정도로 집안이 반짝반짝했다. 그런데 이제 안다.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 아무리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고 나를 박박 닦아내도 속에 쌓여서 썩어가는 알코올은 절대 제거할 수 없지. 간이 알코올을 분해하는 시간은 5~6시간이지만 뇌가 알코올을 분해하는 시간은 대략 42일이 걸린다고 한다. 충격적이지 않나? 그렇다면 나는 술을 마신 지난 1년여간 알코올에게 살해당하고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운이 정말 좋았다. 



정신과에 가서 중독을 고백하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어쩌면 반은 정신과에 첫발을 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반은 이제 진짜로 술을 마시면 안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그건 너무 가혹하니까, 이 맛있는 술을 끊어야 하니까).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겨우 초진을 볼 수 있는 다른 병원과 다르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언니에게 추천받은 한가한 정신과는 3년 동안 알레르기(어쩌면 알코올 알레르기일지도 모르는) 약을 처방받으러 갔던 피부과 바로 옆에 있었다. 3년 중 하루는 이곳에 왔을 수도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술을 마시게 된 기간과 원인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셨다. 바로 전에 심리상담을 받은 경험이 초진 상담에 도움이 되었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로 그것을 풀기 위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나의 문제를 바로 파악하셨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방법은 두 가지예요. 지금처럼 사시던가, 완전히 끊고 한 방울도 마시지 않던가. 혼자 매일 밤 술을 먹는 습관을 들인 사람은 그 습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요."



그동안 이도 저도 아닌 여러 개의 가면을 쓰며 시어머니에게 며느리, 남편에게 아내, 아이들에겐 엄마, 청중에게는 강사로서, 선생님에겐 학부모로서 살아가던 나는 술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낙을 찾을까 두려움에 빠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시작이라도 해 봐야지. 상담을 마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돌아가려는 뒷모습에 혹시 모르니 우울증 검사도 해 보고 가라 하신다. 사흘 후에 다시 만나자며.



정신과 약은 약국이 아닌 병원 내에서 처방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밥을 먹고 약봉지를 털어 넣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술 생각. 오늘은 신기하게 술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집에 오자마자 유산소 운동을 하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예쁜 달걀말이를 만들어 아이들 저녁을 차린 후 아이들을 하원시켰다. 아이들이 방문 수업을 하는 동안 쓰레기를 비우고, 분리수거를 하고, 건조기를 돌리고, 설거지했다. '작가님을 본 지 nn일이 되었어요'라고 외치던 브런치도 무시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다시 글을 쓸 용기를 낸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가벼운 기분, 혹은 약 때문에 몽롱한 기분으로 단주 일기를 스타트한다. 이 기분이 부디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외로운 싸움의 시작, 술과의 이별 0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