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래요?
요가를 하며(특히 홈요가) 깨달은 진리는 하나. 매트를 피고 사마스티티 선자세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가는 운동이 아니라 수련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요가를 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 욕심 낸다고 아사나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힘을 빼고 잊고 있다가 갑자기 선물처럼 다가오는 아사나인 것처럼 인생 또한 그렇다. 오늘도 요가원에 가지 못했지만 집에서 꾸역꾸역 매트를 피고 아쉬탕가로 홈 수련을 끝냈다. 아쉬탕가의 가장 큰 장점은 매일 같은 시퀀스를 하다 보니 유튜브나 강사의 큐잉 없이도 혼자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
요가를 만나기 전까지 나를 표현하는 단어는 ‘경쟁’이었다. 항상 애쓰고 열정이 넘치고 무엇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 한 때는 누군가를 이겨야만 속이 후련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에너지고 원동력이라 믿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에서는 항상 외친다. ‘그만 이겨, 무슨 의미가 있니?’ 그런 무의식을 외면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해야만 살아남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는 최적화된 사람‘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진짜 내 모습이 그게 아니라는 걸 번아웃을 맞이한 후에 알게 되었다.
요가를 알기 전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 애쓰고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며 내린 결론이 '성장'이었는데,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고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을 얻고 나서 깨달았다. 그건 '성장'이 아니라는 것. 느리고 비선형으로 바뀌더라도 나를 돌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하얗게 불태운 게 아니라 정말 활활 타오르다 까맣게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내 마음. 그 재를 깨끗이 치우고 물로 닦아내고 청소한 뒤에 다시 흙을 놓고 씨앗을 하나 심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삶의 의미 따윈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살면 된다. 대신 하루를 충실하게. 때로는 게을러도 그런 날 안아주고 이해해 주고,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날도 '오늘 망했다'보다 '이런 날도 있지 뭐' 생각하는 쿨함을 가지면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게 살이 있는 삶이었다.
술을 끊고 약물치료를 하고 요가를 만나는 과정이 내 마음에 새로운 싹을 트게 하는 그 과정과 꼭 같았다. 어제 잘 되던 아사나가 오늘은 안되기도 하고, 영원히 안될 것 같던 자세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기쁨과 슬픔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면 목적이나 목표 없이 꾸역꾸역 해 나가면 되는 게 요가다. 매일매일 수련하는 날 보고 누군가는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 생각하겠지만, 이건 운동이자 마음 수련이자 수행이다. 요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살려고. 이걸 안 하면 내 마음이 또 화로 가득하고 불구덩이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다. 요가를 하며 화가 덜 나고, 체력이 좋아지고, 삶이 심플해진다.
오늘의 깨달음은 매트 피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행위가 가장 힘들다. 물론 나에겐 지속하는 것 역시 힘들지만, 마음먹고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나열해 본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이를테면, 당장 보내야 하는 원고 퇴고, 교육원 홈페이지 만들기, 사업 확장하기 등등. 마음먹은 지 1년이 넘은 일들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 이 일들은 마치 매트 앞에 정갈하게 서서 발바닥의 삼각 지점에 힘을 주고 어깨를 끌어내리고 턱을 가슴에 붙이고 괄약근에 힘을 꽉 주는 사마스티티와 같다.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매트를 피자. 매트를 피면 누워서 다리라도 뻗는다. 그러면 몸을 일으켜 선자세인 사마스티티를 할 마음이 생긴다. 인생은 매일 이렇게 사마스티티로 시작해야 한다. 싫더라도 습관처럼. 오늘의 깨달음은 아사나의 성공과 실패가 아닌 인생의 깨달음이다. 누구도 보지 않지만 혼자 쓰는 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도 엄청난 시작이라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