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형형색색의 바지가 부끄러움의 징표가 되었다
요가를 시작한지 이제 딱 2년이 되었다. 제대로 한 건 1년 반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하루 두 타임씩 연강을 듣고 거의 매일 수련을 하다 보니 비약적인 발전이 있던 건 사실이다. 몸을 못쓰는 팔자라고 알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로봇과 버금가는 뻣뻣인간인데, 요가가 좋아지나디?
요가에 눈을 본격적으로 뜬 2023년 3월. 당시 나는 술을 끊고 그 도파민 회로를 돌릴 다른 경로를 찾고 있었다. 휴대폰 게임도 해 보고 무한도전도 재탕하며 깔깔 웃어봤지만, 사실 그런 얕은 도파민의 치환은 술을 끊고 건강하게 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건강해져야 겠다.'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독소를 품은 간을 잊은 채 숙취요가를 하던 나날에서 드디어 벗어나 나는 술 기운 없이 완벽한 맨 정신으로 요가를 접하게 되었다. 재밌었다(당시에는, 지금은 이 감정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안다). 조금씩 늘어가는 아사나도 재밌었고, 선생님의 칭찬도 기분 좋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취미에 돈을 크게 써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가졌던 가장 비싼 문화생활이었던 공연 보는 것 정도도 이제는 재미가 떨어져서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좋은 핑계거린가? 단 한번도 취미에 돈을 투자했던 적이 별로 없는데, '요가'라는 건강한 취미가 생겼고 이 핑계로 여기에 좀 투자하는게 뭐 그리 나쁜 일인가?
그 때 부터였을까. 요가가 패션으로 보였던 때는?
인스타에 화려한 아사나를 하며 공작새 처럼 옷을 입고 있는 알록 달록 컬러감 속 많은 요기니들. 엥, 그런데 자사히 보니까 레깅스가 아니라 펄럭이는 바지다. 근데 이제 거기다 '힙'을 곁들인...? 레깅스가 다 인줄 알고 젝시믹스 레깅스에 티셔츠 달랑 입고 가며 가랑이가 불편하다고 징징댔던 나날들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가랑이를 해방시킬 수 있다니. 이거야 말로 진짜 코르셋에서 벗어나는 운동복 아닌가?
그렇게 알게 된 발리스타일의 브랜드 부디무드라, 찬드라. 그리고 그 밑에 관련 된 다른 브랜드들.. 디야니, 무브웜, 모어아웃, 소함소함, 에스타리 등등. 세상에 예쁜게 왜 이렇게 많아? 사실 처음 옷을 구입할 때에는 온전한 가랑이 해방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점 일상의 패션과 경계가 없어지면서 이 옷들은 내 일상복이 되기 시작했다.
옷장이 모자랐다. 미어 터지다 못해 둘 곳이 없어져서 요가복을 위한 서랍장을 하나 더 구입해야만 했다. 제대로 한 번을 계산 해 본 적 없지만 빨주노초파남보의 형형색색 요가복이 다 모인 뒤에야 깨달았다.
'젠장, 술 끊고 그 도파민이 쇼핑 중독으로 왔구나.'
매일 매일 다른 바지와 브라탑, 그 날의 컨디션과 하는 요가 종류에 따라 다른 옷을 입으며 다녔던 나는 사실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시선의 중심에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 현타온다. 세상에 명상하고 마음 잠재우려고 요가하는데 쇼핑중독자에 타인시선 중독자가 되다니?! 이 무슨...
텅텅 비어버린 내 머리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책을 보는 것을 선택했다. 가장 처음 선택한 책은 '물욕의 세계'. 분명 이 소비중독에는 문제가 있음을 자각했고 내 정신과 심리상태를 들여다보기 위해 선택한 책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뜻밖의 다른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옷이 내 손안에 들어오기 까지의 수 많은 착취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패션(옷이 아니라 정말 패션이다)이야 말로 기후위기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영역라는 것.
간단히 말하면 면직물은 생산 과정에서부터 약자(어린이, 여성)의 착취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거기에 포함되는 수 많은 합성섬유들은 미세 플라스틱을 유발한다는 것. 게다가 버려진 옷들은 폐기되기가 힘들어 제3의 국가에 운반되어 그 곳에서 또 다른 엄청난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사실. 그 뒤로 이소연 작가의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읽고, 나는 정말로 옷 사는 걸 멈추었다. 거의 8개월가량 요가복을 비롯한 그 어떤 옷도 사지 않았다(덕분에 강의 옷 역시 단벌신사 처럼 몇 벌을 돌려입게 되었다).
사실 살 필요도 없었다. 왜냐면 이미 옷장을 터질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사지 않겠다'말하는 것 조차 되게 부끄러운 상황이 돼 버렸다. 누군가는 이 역시 '신자유주의 속 특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 끝판왕까지 가 봐서 이제야 깨달아 버린 무지한 나인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아닌가 싶기도 하고.
요가를 하면서 자연물과의 교감과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매일 깨닫는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에서 요가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철저히 자본과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진 패션 산업에 혹하여 패션 요가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무척 부끄러웠다. 자아실현을 위해 패션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히 누군가에겐 합당한 이유가 되겠지만, 진짜 수행으로서의 요가를 하는 사람에게 패션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아를 버리라는 인도의 철학과도 맞지 않고, 타인을 의식하는 마음은 요가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화려한 요가복을 입고 화려한 아사나를 취하는 SNS속 인플루언서를 경계한다. 내가 스승으로 삼고 싶은 요가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기에.
게다가 그 속에 페미니즘을 얹혀 해석하자면 더 기괴하다. 남자 요기들이 화려한 옷 입고 요가를 하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사실 그 '패션 요가'에서 소구되는 것 역시 여성이다 보니 당연히 여성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벗어나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다. 그 속에서 착취되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대상화되고 타자화 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이 글을 본 사람 한 명이라도 함께 바꾸어 보는게 어떨까?
그럼 뭘 입고 요가를 하냐고? 그냥 티셔츠에 반바지 하나면 충분하다. 그게 진짜 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