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여자와 남자는 12시의 산책을 즐기곤 했다. 주변 공단에서 불어온 오염된 공기 때문에 목이 매캐하긴 했지만, 12시의 산책은 하루 중 가장 높은 태양 아래에서 걷는다는 의미에서 좋았다. 주거지역과 공단지역 간 완충지대로 조성한 공원은 그 넓이에 비해 공기정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나무들은 쌀알만 한 새순을 당돌하게 내밀며 생명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봄을 예고하는 수선스러움이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들 사이에서 느껴졌다.
산책 후 집에 돌아온 여자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남자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오후의 집은 고요했다. 땅이 태양열을 흡수하고, 다시 우주로 내보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지상이 가장 따뜻해지는 것은 몇 시간 후다. 오후 2-3시의 고요한 집안에 낮게 틀어놓은 인디음악과 타닥거리는 자판소리가 가득 찼다. 가끔 여자가 거실에 나가면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발라당 누워 다리를 쭉 뻗었다. 너무 조용해서 남자의 방문을 빼꼼 열어보니, 그는 낮잠에 빠져 있다. 실눈을 뜨고 '졸려'라고 말한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방문을 닫아 주었다. 이윽고 고양이도 흔들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다. 창밖에는 파란 하늘에 투명한 햇빛이 깨끗하게 투과되고 있다. 여자는 낮잠을 참고 업무로 돌아갔다.
낮에 5분쯤 느리게 뛴 것만으로도 남자는 몸살이 걸린 듯 몸이 아프다고 했다. 격렬하게 반응하는, "죽을 것 같아"라고 외치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자는 몇 시간 누워 있어야 했다. 잠을 자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할 때, 여자는 가끔 '남자가 이미 죽은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기이할 만큼 체력이 나빴다. 남자에게 암이나 희귀병, 뭔가 진단받을만한 신체에 관련된 병은 없었다. 단지 우울하고 불안할 뿐이었다. 우울과 불안이 병의 하나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에 신체화 증상이 나타난 건지, 무언가로 인해 몸이 오랫동안 소진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망가진 건지는 몰랐다. 공장식 닭장에 갇혀 스트레스로 자기 몸을 쪼고 깃털을 뽑는 닭처럼 시스템의 희생양일 수도 있었다. 여자도 닭장 안의 닭인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신경이 좀 더 무디고 닭장에 적응한 것일 뿐, 결국에 도축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잠든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 또는 그것과 비슷한 허무를 느꼈다. 일상에서 벗어난 것, 생명에서 멀어져 가는 것, 세상을 등지는 것. 늦은 아침까지 열리지 않는 침실 방문을 볼 때나, 갑자기 지쳐 누운 모습을 볼 때, 여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외롭다고 느꼈다.
고양이의 낮잠과 남자의 낮잠은 달랐다. 적어도 여자가 보기에, 고양이는 만족스럽게 낮잠을 잤고 깨어났을 땐 생기로 가득했다. 고양이의 낮잠에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추운 날에도 고양이가 몸을 말고 자는 공간만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남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을 잤고,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남자의 낮잠에선 시니컬한 냉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삶이 어떻게 생기로 채워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불안과 우울이 기습적으로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체념 또한 깔려 있었다. 은밀히 세상과 불화하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가슴속에 무거운 돌멩이가 쌓이는 느낌이 들어 가끔 큰 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낮잠을 자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겨울이어서, 봄이어서, 그런 것과는 무관했다. 남자의 낮잠은 오로지 남자의 내면의 필요와 조응하고 있었다. 낮잠은 일단 세상의 잡음을 피하게 해 주었다. 물론 낮잠이 완벽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때로는 위협당하고 깜짝 놀라는 꿈을 꾸는 듯했다. 하지만 적어도 현실로부터는 도피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낮잠이 무균실처럼 나쁜 병균을 막아준다는 것에, 희망보다는 실망을 느꼈다. 남자는 강풍이 지하 주차장을 통과하는 소리에도 탈진했고, 여자가 알 수 없는 어떤 생각이나 외부자극에 의해 탈진했다. 여자는 생각했다. 그를 잃어가고 있어. 낮잠이 길어질수록, 그의 몸과 마음이 무균실에 맞춰질수록, 예전에 알던 그 남자가 돌아올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 가능성에 대해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려고 하지 말자, 여자는 되뇌곤 했다.
여자도 점점 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일을 해야 하니 낮잠은 자지 않았지만, 자고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남자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자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모든 사람이 아주 많이 자는 세상이 되면 좋을 텐데. 어차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데, 모두들 하루에 6시간 정도만 깨어있기로 하면 좋지 않을까? 덜 먹고, 영상도 덜 보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모두들 최소한으로 살아있으면 어떨까, 환경에도 좋지 않을까? 분명 기후변화를 늦추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모두가 더 느리게 움직이고,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살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쥐도 새도 모르게... 잠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거야....